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2월, 2025의 게시물 표시

성실한 친구 / 고집스런 악인

성실과 고집은 언뜻 닮아 있습니다. 하나에 꾸준하다는 데에 있지요. 고집스러운 마음을 성경은 '완고한 마음'이라고 부릅니다. 둘의 차이는 방향에 있습니다. 성실함은 선을 향한 방향이고 완고함, 고집스러움은 악을 향한 방향이지요. 저는 완벽한 사람은 아니지만 저 스스로에 대해서 하나는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선택한 사제 성소에 성실한 사람입니다. 저는 사람들의 구미에 저를 맞추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과 그분의 부르심에 성실하고자 애쓰는 사제입니다. 반면 자신의 악습에 고집스러운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사실 악도 변덕스러운 사람이나 게으른 사람을 싫어합니다. 악에도 요구되는 것은 성실함입니다. 오늘 함께 범죄를 저지르기로 하고 내일 당장 마음을 바꿔 버린다든지, 약속한 시간에 약속한 범죄를 하기로 하고서 게으른 나머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버리니까요. 성경은 영원한 생명을 향해 성실한 사람을 칭송합니다. 언제나 꾸준히 한 방향만을 바라보는 사람, 그래서 언제든지 그에게 의탁할 수 있고 선을 향해 나아가다가 힘들 때에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그 사람과 맺는 것이 진정한 친교이고 우정입니다. 반면 헛된 관계를 우정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여서 서로 수근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서로 악을 공모하고 그것을 실행하여 자신이 이득을 얻는 동안에 서로 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툭하면 술판을 벌이고 그 안에서 서로의 우정을 새로이 맹세하지만 결국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을 잘못 믿으면 나중에 큰 화를 당하게 됩니다. 그는 고난의 때에 나를 저버릴 사람이고 내가 함께 나눈 나의 힘겨운 점을 약점 잡아 나를 이용할 사람입니다. 이제 복음으로 들어가서 '완고함'에 대한 합당한 조치를 살펴봅시다. 악을 향해서 고집스럽게 치달아가는 사람에게 적절한 요소는 바로 율법과 규정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아내를 저버리고 방치하는 이들에게 최소한 이것이라도 하라고 규정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반대와 지지

오늘 복음에는 우리 편에 속하지 않았는데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이들을 두고 괜찮으니 그냥 두라고 하십니다. 이 상황을 조금만 더 묵상해 들어가면 반대의 상황도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같은 편에 있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반대하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같은 유대인들의 반대를 가장 심하게 받았습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찾아왔고 따뜻하게 대하였고 그분에게서 은총을 갈구하고 그것을 얻어 갔습니다. 정작 같은 민족들에게서 증오와 반대를 받고, 가장 신뢰하고 지지를 얻어도 성치 않은 고향 마을에서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이런 일들은 오늘날에도 유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저 교회의 인적 자원을 증가시키는 일이 아니라 영의 세력과 맞서는 일입니다. 즉 더러운 영들에 대항해서 복음이 전해집니다. 선한 영혼들은 복음을 기뻐할 테니까요. 그래서 악한 영들, 더러운 영들은 이 복음에 반대합니다. 선한 이들이 무언가에 반대할 때에는 정당한 방법을 씁니다. 하지만 더러운 영들은 그 더럽고 사악한 내면을 그대로 실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쓰는 방법은 치졸하고 더러우며 음험해서 선한 이들은 감히 상상도 못할 뿐더러 그런 방법이 있다는 데에 경악할 방법을 쓰곤 합니다. 그래서 언뜻 보기에는 선한 이들이 무차별적으로 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선한 이들은 기껏해야 정의에 항변하고 자신의 권리나 수호하는 것이 전부니까요. 누군가를 공격할 의지도 없고 오히려 적지 않은 경우에 용서를 베풉니다. 하지만 오늘 1독서에 등장하는 지혜는 바로 그런 선한 이들의 내면에 깃들어 그들에게 길을 알려줍니다. 오늘 집회서에 등장하는 지혜의 길안내는 참으로 아름다운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혜는 처음에 그와 더불어 가시밭길을 걷고 그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몰고 오리라. 지혜는 그를 신뢰할 때까지 자신의 규율로 그를 단련시키고 자신의 바른 규범으로 그를 시험하리라. 그러고 나서 지혜는 곧 돌아와 그를 즐겁게 하고 자신의...

성경의 숨은 뜻(정결한 짐승 부정한 짐승)

창세기가 역사서나 과학 보고서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도 단순한 과학적 정보를 담고 있거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하느님이 우리를 어떻게 돌보시고 우리는 하느님에게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다루는 책입니다. 이제 그런 관점으로 노아의 사건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먼저 하느님의 마음 아픔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무엇에 마음 아파 하시는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저지르는 악입니다. 여기서 악을 단순히 세상이 법적으로 규정하는 악이라고 보면 안됩니다. 세상의 판단은 미흡하고 언제나 그 내면의 본질을 올바로 꿰뚫어 바라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법정에서 여러차례 항소심을 통해 정의를 판단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은 정의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일들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선과 악은 오히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비롯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것은 모두 선이 되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악이 됩니다. 그래서 불편하지만 그런 경험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선이 되고 반대로 편안한 삶이 오히려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면 그것은 악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하느님은 당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처분하고자 하십니다. 이는 하나의 표상입니다. 예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훗날 하느님은 종말을 통해서 이 일을 완수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지상의 사람들 가운데 오직 하나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있던 노아와 그 노아에게 딸린 짐승들 외에는 모두 처분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나옵니다. 짐승은 사실 인간 군상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인간적 오류를 벗어나고자 애를 쓰는 존재들, 그나마 하느님을 찾고자 노력하는 이들을 정결한 짐승으로, 그리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은 하지만 세속성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존재들을 부정한 ...

행복과 불행

자녀들에게 용돈을 받아서 행복한 부모도 있지만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내면이 성실한 이로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행복한 부모도 있습니다. 사제가 같이 고급 스포츠를 즐겨 주고 고급 양주를 마셔줘서 뿌듯해하는 신자도 있지만 사제가 열과 성을 다해 말씀을 준비하고 사람들에게 신앙을 설파하는 데에서 기쁨을 누리는 신자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의 기준은 저마다 다릅니다. 그건 사람들이 변덕스럽고 악에 쉽게 물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에게는 행복과 불행이 뚜렷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숨을 불어 넣으시면서 당신의 모습을 선물해 주셨고 우리 안에도 사실 그 행복과 불행의 기준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동물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능 안에서 행복해 하듯이, 즉 맛있는 음식을 먹고 편안해지면 행복해지듯이 인간도 자신의 고유한 기능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도 한편으로는 동물이라 같은 행복의 기준을 가집니다. 하지만 인간은 거기에서 멈출 수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초월성'을 갈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고 그 영혼의 본성 안에서도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우리를 하느님에게 초대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어야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의 행복을 말하고 하늘에서 받을 상에 대해 언급합니다. 사실 행복은 간단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모습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고 있는 이들은 이 현세에서 박해를 받고 부족해 보여도 결국 '행복해질' 사람들이고 그 행복은 하느님의 본성에 따른 영원한 행복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이 지상에서의 행복, 결국 사라지고 말 행복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하느님께서 불행하다고 선언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상의 행복을 칭송하겠지만 그것은 바로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 나오는 부분과 일맥상통합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부활의 신뢰 여부

제가 교리때 늘 가르치지만 우리 신앙의 핵심은 '부활'입니다. 그리고 이 부활은 그저 육신 생명이 다시 잠깐 회복되는 수준의 부활이 아니라 진정으로 행복하고 영원한 참된 부활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이 부활을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부활의 신앙이 내재된 사람은 어떤 시련을 당해도 걱정이 없습니다. 자신이 부활할 것을 알고 그것이 최고의 보상이라는 것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제로도 신앙인들은 현세에서 많이 잃게 됩니다. 그들이 가진 고유한 선함 때문에도 많은 것을 잃게 됩니다. 악인들과 사기꾼들, 즉 속이는 자들은 선한 이들을 공략 대상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믿는 부활 속에서 더 큰 상급을 돌려받게 될 것입니다. 반대의 위치에 있는 이들, 성경의 표현을 빌자면 '현세만을 위하는' 이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이들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현세만을 위해서 그리스도께 희망을 거는 이들은 모든 인간 가운데 가장 불쌍한 인간이 됩니다. 애시당초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아버지를 위해서 현세의 것을 모두 잃는 모범을 보이셨는데 이 가련한 영혼들은 현세의 것을 얻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가장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부활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 지상에서 겪은 여러가지 경험들을 통해서 그 신앙을 더욱 확고히 간직합니다.

물가에 심긴 나무

예레미야서는 선과 악의 구도를 드러내며 악에 헌신하는 이를 사막의 덤불로 선에 헌신하는 이를 물가에 심긴 나무로 묘사합니다. 덤불이 가지고 있는 특성은 메마름과 고립입니다. 그래서 덤불은 하느님의 은총에서 배제된 채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의 영혼은 메말라 있습니다. 영혼이 메마른 사람은 거기에서 퍼져 나오는 괴로움을 가시로 만들어 남을 찌르는 데에 사용합니다. 그래서 덤불에는 다른 동물들이 깃들지 않습니다. 또한 그는 고립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립은 인간관계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언뜻 외견적으로 많은 사람과 어울리는 듯한 인상을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 누구도 그의 친구가 아닙니다. 서로의 이해관계와 좋은 술과 좋은 음식이 있어서 모이는 사람들일 뿐 결국 자신들 안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 어느 누구도 돕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뜻 화려한 인맥 속에 사는 것 같지만 고립된 존재들이고 외로운 이들입니다. 반면 물가에 심어진 나무로 대변되는 사람은 바로 물로 상징되는 영원한 생명이신 분과 친교를 맺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사람의 영혼은 언제나 하느님에게서 은총의 양분을 받기 때문에 촉촉하게 젖어 있고 또 삶의 실천 속에서 언제나 열매를 맺습니다. 나아가 그런 나무에는 여러가지 동물들이 깃들어 살아갑니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물과 열매가 있는 곳이라면 찾아오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 사람은 평소에는 홀로 고독하게 지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외롭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하느님 안에서 서로 친교를 맺고 있는 이들이 언제나 형제와 같은 사람입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죄가 없으면 구원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활 찬송에서는 이런 구절이 있기까지 합니다. 참으로 필요했네 아담이 지은 죄 그리스도의 죽음이 씻은 죄 오 복된 탓이여 너로써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 구세주는 의로운 세상을 만끽하러 오시는 분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죄인들 가운데에 사셔야 했고 그들의 변화, 즉 회개를 위해서 애쓰셔야 했습니다. 교회에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교회가 순수해야 한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지향점에 있어서는 거룩하고 순수합니다. 하지만 현실의 교회는 죄인들이 모여드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는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런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누구든 하느님께 다가가고 싶은 사람을 받아들이고 가르치고 정화되고 성화되어 가도록 하는 것이 그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스승님은 순명하는 그 죄인의 죄를 없애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를 사람낚는 어부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고백하듯이 하느님의 은총이 그 일을 이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죄인으로 느끼십니까? 참 잘 되었습니다. 이참에 그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예수님을 만나면 되니까요.

헛되이 믿다

헛되이 믿을 수 있습니다. 마치 빵에도 공갈빵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많은 양을 기대하지만 그 대부분은 텅 빈 빵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도 공허한 신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즉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지만 실제로 하는 일은 하나도 없는 신앙입니다. 적지 않은 신앙인들이 헛되이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한다 예수님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분들이 정작 필요해서 찾을 때에는 응답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표를 드러내는 것이 현실적으로 이득이 되기 때문에 믿는 시늉을 했을 뿐입니다. 과거 세상이 어려웠고 교회에 얻어먹을 것이 많을 때에는 이 현상이 더 극심했습니다. 그나마 오늘은 성당에 무언가를 얻어 먹으러 오는 사람은 잘 없어서 덜하지만 오늘날에는 '관습적으로 굳어버린 신앙'이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습관처럼 성당에 오지만 최소한만 하고 절대로 자신을 내어주지 않으려는 신앙인들이 넘쳐 흐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의 공통점은 '고생'입니다. 그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수고를 하고 고생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가 전해 받은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수난 당하고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수난이 없고 죽음이 없으면 그분의 되살아남도 없습니다. 죽지 않는데 어떻게 살아납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가고 싶은 길이면 누구나 갑니다. 원하는 것이면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블루 오션은 머지않아 금방 레드 오션이 되어 버립니다. 세상의 여정은 그렇습니다. 누구나 원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신앙 안에서도 때로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신앙 안의 요소가 모두 같은 것이 아니라 신앙 안에도 세속인이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돈을 잃는 것은 싫지만, 그만큼 명예가 회복된다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당마다 눈에 잘 보이는 위치에 많은 공헌을 한 사람들의 이름이 드러나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신앙의 길은 가시밭길인데다가 아무도 알아주는 이도 없어서 그 길을 가고자 하는 이가 드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진실로 응답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거룩한 불, 성령의 숯으로 정화된 이는 마음과 생각이 달라집니다. 남들이 가고자 하지 않는 길을 가려고 합니다. 남들이 기피하고 꺼려하는 일을 하고자 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내가 아뢰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믿음이라는 것은 어떻게 형성될까요? 그것은 말과 그 말의 실행으로 증명됩니다. 믿음이 있기 위해서는 먼저 '약속'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실행하는 것을 통해서 믿음은 증명됩니다. 하지만 이렇게만 단순한 구도로만 믿음이 형성되는 것이라면 사기꾼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말하고 약속을 지키는 듯한 인상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것을 단기간 하고 난 뒤에는 커다란 속임수가 존재합니다. 결국 그들은 큰 것을 숨기기 위해서 작은 것을 내어주는 셈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참된 것이려면 '꾸준함'과 '성실함'이 필요합니다. 비근한 예로 어느 본당이든 터줏대감 행세를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본당을 너무나 사랑하며 본당을 위해서 많은 것을 할 것 처럼 이야기하면서 스스로 집주인 행세를 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 공허한 말은 머지 않아 입증되고 맙니다. 아주 작은 성가심에도 그들은 자신의 직분을 내던지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도망가 버리고 맙니다. 그들의 말이 그들의 행실로 증명된 셈입니다. 그들의 말은 공허한 것이었고 그들은 본당도 신자들도 사랑하는 이들이 아니었음이 그들의 실천으로 입증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꾸준히 지켜봐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삶의 진솔함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비록 성경에 예수님의 소년 시절은 나와있지 않지만 예수님은 성실하고 선하며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친절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스승이 되어 돌아온 고향에서 예수님은 못마땅하게 여겨집니다. 소위 못믿을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배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그곳에서 몇몇 병자를 제외하고는 아무 기적도 행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놀라운 구절이 등장을 합니다. 바로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의 놀람은 일반 사람들의 놀람과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휴대폰의 새로운 기능을 보면 놀랍니다. 우리의 예상 범...

영혼이 칼에 꿰찔리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주님의 봉헌을 기념하는 중에 그 아름다운 모습과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 보이는 한 구절을 마주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사실 모든 성인들은 하느님 앞에 봉헌된 삶을 살았지만 우리는 성인들 가운데 가장 으뜸이신 분으로 성모님을 꼽습니다. 성모님은 가장 최고의 봉헌의 삶을 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성모님의 모습이 거의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성모님이 무슨 대단한 일을 하셨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 속에는 그 실마리가 간간이 등장합니다.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할까요? 과연 영혼을 누가 찌를 수 있을까요? 영혼을 찌를 수 있는 것은 영적인 도구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불신앙과 하느님을 향한 증오를 의미합니다. 마치 피부가 두꺼운 사람은 자극을 별로 느끼지 못하지만 아기 피부처럼 섬세한 피부를 가진 사람에게는 미미한 자극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것처럼 성모님의 마음은 더욱 순수하고 맑아서 하느님을 향한 사람들의 경솔함을 더 쉽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당신의 아들인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향한 사람들의 증오와 원한은 더욱 그분을 괴롭혔습니다. 성모님은 다른 사람들은 거의 느끼지 않는 그 고통을 마음 한 켠에 늘 품고 사시면서 그것을 이겨내셔야 했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은 지상의 그 누구보다도 더 맑고 깨끗했기 때문에 이 고통은 칼에 꿰찔리는 고통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성당을 나오거나 나오지 않거나 하는 것이 기성 신자들에게도 별로 크게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의 자녀들에게 신앙을 딱히 요구하지도 않고 스스로도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신앙을 지탱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모님은 오늘날에도 이러한 자녀들로 인해서 영혼이 칼에 찔리는 아픔을 견디면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봉헌된 이들의 삶

세상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삶을 위해서 집중되어 있습니다. 나의 생명, 나의 재산, 나의 자식이라는 키워드 속에서 세상은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활동은 사실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심지어 악인도 자신의 자식은 사랑할 줄 압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는 활동을 한다고 칭찬받을 일은 없습니다. 그건 동물적인 본능을 지닌 이라면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인간은 조금 더 고차원적인 만족감을 추구하기 때문에 여기에 '권력과 명예'에 대한 욕구가 추가됩니다. 그러나 이 역시 그 근본 방향에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정신적으로 이상이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추구하는 바입니다. 오늘 2독서는 예수님의 삶의 모범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건 바로 구원을 위한 사명과 헌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이들을 구하고 나아가 유혹받는 이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당신이 모든 유혹을 견뎌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타인을 위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다른 이를 드높여주기 위해서 스스로는 낮은 자리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는 봉헌 축일을 지내면서 '봉헌된 이들'의 삶을 되새깁니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봉헌된 것일까요? 사제는 왜 존재하며 수도자는 왜 존재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의 삶의 지표로 드러납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이들이며 나아가 하느님이 소중히 여기는 그분의 자녀를 위해서 헌신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독신의 삶을 선물 받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자녀들이 아니라 영적 자녀들을 돌보라는 하나의 상징과 같습니다. 그러나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의 자녀를 위해서 헌신하라는 것이 그들 앞에서 순하기만 한 양이 되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고난을 겪으면서 유혹을 받고 그것을 이겨내셨습니다. 따라서 봉헌된 이의 삶에도 비슷한 과정이 이어집니다. 봉헌은 그저 곱상한 삶을 살도록 보장되고 안정된 삶의 영역 속...

정련

연옥(煉獄)이라는 말 속에 들어있는 한자의 '연'이라는 말은 바로 오늘 1독서의 정련(精鍊)이라는 말 속의 연자와 의미가 비슷합니다. 정련의 연자에는 금속을 의미하는 글자가 들어가고 연옥의 연자에는 불을 의미하는 글자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연옥은 더욱 미세한 단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연미사라고 할 때에 쓰는 단어가 바로 연옥의 연자와 맞닿아 있습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내면의 상태'에 눈을 뜨고 있었고 그것을 더 순수하게 하는 데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단순히 죄를 피하는 수준이 아니라 영혼을 더욱 깨끗이 하는 데에 마음을 썼습니다. 그래서 헛된 것에서 눈을 돌리고 영혼을 더욱 드높이려는 노력 속에서 살아갔고 사실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굉장히 부유한 시대를 살면서 동시에 너무나도 유혹이 많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신경쓸 일도 없었고 알지도 못했던 수많은 정보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면서 더 많은 것을 욕구하고 또 분노하고 있으며고 나아가 전에는 쉽게 누리지 못했던 수많은 쾌락들에 둘러싸여 이리 저리 유혹 당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 성당에만 나와도 박수를 쳐주어야 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영적 여정의 길은 여전히 오르막으로 존재합니다. 그저 큰 죄를 피하는 것으로 위안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더욱 순수하게 다듬어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고 그분의 마음에 들도록 우리의 내면을 더욱 정련하여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제물로 바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