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가 역사서나 과학 보고서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도 단순한 과학적 정보를 담고 있거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하느님이 우리를 어떻게 돌보시고 우리는 하느님에게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다루는 책입니다. 이제 그런 관점으로 노아의 사건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먼저 하느님의 마음 아픔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무엇에 마음 아파 하시는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저지르는 악입니다. 여기서 악을 단순히 세상이 법적으로 규정하는 악이라고 보면 안됩니다. 세상의 판단은 미흡하고 언제나 그 내면의 본질을 올바로 꿰뚫어 바라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법정에서 여러차례 항소심을 통해 정의를 판단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은 정의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일들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선과 악은 오히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비롯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것은 모두 선이 되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악이 됩니다. 그래서 불편하지만 그런 경험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선이 되고 반대로 편안한 삶이 오히려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면 그것은 악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하느님은 당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처분하고자 하십니다. 이는 하나의 표상입니다. 예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훗날 하느님은 종말을 통해서 이 일을 완수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지상의 사람들 가운데 오직 하나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있던 노아와 그 노아에게 딸린 짐승들 외에는 모두 처분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나옵니다.
짐승은 사실 인간 군상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인간적 오류를 벗어나고자 애를 쓰는 존재들, 그나마 하느님을 찾고자 노력하는 이들을 정결한 짐승으로, 그리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은 하지만 세속성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존재들을 부정한 짐승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그 둘 다 방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방주는 바로 이 세상의 악 가운데를 항해하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교회에는 그나마 세속 안에서도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이들과 세상 안에 여전히 마음을 두고 있는 이들이 함께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레, 즉 칠일이라는 충만함을 상징하는 시간이 지나자 지상의 생명의 죽음을 상징하는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세례 때에 이미 이 죽음의 물을 거쳐 왔습니다. 홍해바다의 물과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이 물을 지나 우리는 거듭 태어난 이들입니다.
복음은 이런 내적인 사정을 가르치고자 하고 영적인 사정을 설명하려고 하는 예수님을 앞에 두고 여전히 무슨 말씀은 하지는지 못 알아듣고 지상의 걱정이나 하는 이들을 묘사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빵의 기적도 이해하지 못하고 거기에서 남은 빵의 수는 헤아릴 줄 알아도 그 의미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