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을 보고서도 그리로 마음이 끌리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다음의 두 가지입니다.
1) 보물이 가리워져 있다.
2) 보물을 보는 눈이 가리워져 있다.
첫번째로 보물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 나아가 그리스도교 신자들 앞에 이 보물은 제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오늘날에는 ‘속이는 자들’이 등장해서 상황이 더욱 심해 졌습니다. 속이는 자들은 엉뚱한 것을 내놓고는 그것을 두고 보물이라고 합니다. 신앙의 본질에 다가가게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멀어지게 하지요.
신앙의 본질은 케리그마, 즉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사건입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도 죄를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신앙의 본질이 여러가지 겉치장으로 몇 겹 둘러 싸이고 나면 전혀 엉뚱한 산물이 나타납니다. 마치 예전에 율법주의자들이 활개를 친 것처럼 오늘날에는 전혀 다른 모습의,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굉장히 유사한 이들이 활개를 치지요. 세세한 규정들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고 이런 저런 신심 행위를 강조하고 본질적이지 않은 가르침에 얽매이게 만드는 식입니다. 그래서 보물들이 상당히 가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보물을 사람들에게 열어줄 진정한 예언자가 필요한 시대가 된 것이지요.
둘째로는 보물을 보는 눈이 가리워져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고질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원조였던 아담과 이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지요. 우리는 보물을 바라보고도 엉뚱한 보물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 자신의 탐욕을 고집하지요. 이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널리 퍼져 있는 문제입니다. 적지 않은 이들은 보물에 대해서 분명히 들었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선택으로’ 눈멀음을 선택하는 것이지요. 자신의 자유의지로 눈 먼 상태를 고집하는 것입니다. 마치 알콜 중독자에게 알콜에서 해방된 삶의 기쁨을 열심히 역설 하였음에도 그에게 선택을 내어 주었을 때에 알콜을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는 별다른 수가 없습니다. 오직 진정한 ‘회개’만이 답이지요. 하지만 이 회개는 타인의 힘의 개입으로 억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스스로 이룰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걸 하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옛 것이 좋다고 하면서 여전히 더러운 물에서 놀기를 즐기는 것이지요. 깨끗한 물과 새 옷을 마련해놓고 아무리 초대를 해도 바쁘다고 전의 삶에서 아직 미련이 남아 새로운 삶으로 갈 수 없다고 퇴짜를 놓는 셈입니다. 그들에게 초대장이 몇 번 더 갈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은 그들의 것이고 합당한 대우를 받게 될 것입니다.
보물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리는 매 주일의 미사 성제에서 그 보물을 만나고 있지요. 하지만 과연 우리는 그 보물을 얼마나 보물스럽게 느끼고 있을까요? 그저 매주 반복되는 같은 예식이라고 생각하면서 벌써 ‘지겨워’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1) 보물이 가리워져 있다.
2) 보물을 보는 눈이 가리워져 있다.
첫번째로 보물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 나아가 그리스도교 신자들 앞에 이 보물은 제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오늘날에는 ‘속이는 자들’이 등장해서 상황이 더욱 심해 졌습니다. 속이는 자들은 엉뚱한 것을 내놓고는 그것을 두고 보물이라고 합니다. 신앙의 본질에 다가가게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멀어지게 하지요.
신앙의 본질은 케리그마, 즉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사건입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도 죄를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신앙의 본질이 여러가지 겉치장으로 몇 겹 둘러 싸이고 나면 전혀 엉뚱한 산물이 나타납니다. 마치 예전에 율법주의자들이 활개를 친 것처럼 오늘날에는 전혀 다른 모습의,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굉장히 유사한 이들이 활개를 치지요. 세세한 규정들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고 이런 저런 신심 행위를 강조하고 본질적이지 않은 가르침에 얽매이게 만드는 식입니다. 그래서 보물들이 상당히 가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보물을 사람들에게 열어줄 진정한 예언자가 필요한 시대가 된 것이지요.
둘째로는 보물을 보는 눈이 가리워져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고질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원조였던 아담과 이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지요. 우리는 보물을 바라보고도 엉뚱한 보물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 자신의 탐욕을 고집하지요. 이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널리 퍼져 있는 문제입니다. 적지 않은 이들은 보물에 대해서 분명히 들었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선택으로’ 눈멀음을 선택하는 것이지요. 자신의 자유의지로 눈 먼 상태를 고집하는 것입니다. 마치 알콜 중독자에게 알콜에서 해방된 삶의 기쁨을 열심히 역설 하였음에도 그에게 선택을 내어 주었을 때에 알콜을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는 별다른 수가 없습니다. 오직 진정한 ‘회개’만이 답이지요. 하지만 이 회개는 타인의 힘의 개입으로 억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스스로 이룰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걸 하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옛 것이 좋다고 하면서 여전히 더러운 물에서 놀기를 즐기는 것이지요. 깨끗한 물과 새 옷을 마련해놓고 아무리 초대를 해도 바쁘다고 전의 삶에서 아직 미련이 남아 새로운 삶으로 갈 수 없다고 퇴짜를 놓는 셈입니다. 그들에게 초대장이 몇 번 더 갈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은 그들의 것이고 합당한 대우를 받게 될 것입니다.
보물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리는 매 주일의 미사 성제에서 그 보물을 만나고 있지요. 하지만 과연 우리는 그 보물을 얼마나 보물스럽게 느끼고 있을까요? 그저 매주 반복되는 같은 예식이라고 생각하면서 벌써 ‘지겨워’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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