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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찾는가?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을까요?’ 이 질문은 다른 말로 ‘우리는 무엇으로 찾는가?’로 바꾸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눈으로는 보이는 사물을 찾고 귀로는 들리는 음성을 찾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눈은 감기지 않았고 귀는 닫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보고 있고 듣고 있다고 생각하지요.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마태 13,15)

그럼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렇습니다. 전혀 다른 눈과 귀가 있습니다. 아니 더 엄밀히 말하자면 눈과 귀 안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거르는 또 하나의 감각 기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이지요.

성경의 ‘저 백성’은 신앙이 없는 이들, 믿을 마음이 없는 이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셈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본다고 생각하고 듣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여행가가 자신이 다녀온 여행지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을 합니다. 그 앞에 앉아 있는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그 여행가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입니다. 신뢰하는 이는 그가 말하는 모든 것들을 솔직히 받아들여 자신 안에 이런 저런 그림을 그려 보겠지만 신뢰하지 않는 이는 같은 이야기를 듣더라도 그가 하는 이야기가 내면에 받아들여지지 않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을 눈 앞에 두고도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자들과 군중들은 같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제자들이 듣고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의 신뢰하는 마음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지혜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 그 안에 더욱 더 희망을 키워 나갔고 그래서 예수님의 지혜를 더욱 더 받아들여 풍요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거부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말을 들으면서 오히려 거부감이 더욱 커져갔고 급기야는 예수님을 죽이겠다는 어두운 마음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2절의 이 구절은 바로 이러한 내용을 설명합니다. 흐릿한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뚜렷이 드러나지 않지만 강렬한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확실히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다가오심으로 우리 안에 있던 빛과 어둠이 더욱 극명해집니다. 스스로의 선택으로 신앙을 거부한 그들에게 ‘치유’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선택한 그 길의 끝을 보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믿는 이들의 마음에는 영원한 생명의 씨앗이 시작될 것입니다.

하늘아, 이를 두고 깜짝 놀라라. 소스라치고 몸서리쳐라. 주님의 말씀이다. 정녕 내 백성이 두 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 (예레 2,12)

예레미야서의 주님의 이 경고 말씀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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