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를…
가끔씩 영화에서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보스의 신임을 가득히 받던 이가 크나큰 실수를 해서 이제는 직분을 상실하게 될 위험에 처하게 되면 그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마주잡고는 보스에게 간청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라고 말이지요.
우리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려 볼까요? 뭐 여러가지 버전이 있겠지만 일단은 침상에 드러누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그때에 가서야 우리의 삶을 보다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때에 하느님 앞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모든 희망이 꺼지게 되는 그 날, 돈도, 명예도, 미모도, 건강도 소용이 없게되는 수명이 다하는 그 날에 과연 우리의 내면에는 어떤 의욕이 남아 있게 될까요?
어쩌면 우리의 하루하루는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소중한 ‘기회’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하루라는 기회, 이런 기회들이 모이고 쌓여서 우리의 생을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기회들을 허투루 쓰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조금 더 이뻐지려고, 조금 더 유명해지려고, 조금 더 부유해지려고 기를 쓰다가 생을 소비해 버리고 말지요. 아침 햇살을 제대로 누려 본 적도 없고, 아름다운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으며, 사랑하는 아이들의 미소를 여유있게 바라보지도 못하고 아내의 주름진 얼굴을 쓰다듬으며 함께 해 줘서 고맙다는 말 한 번 못해 본 셈이지요.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작은 노력으로 하느님을 알 수도 있었을 수많은 기회들, 그 아름다운 구원의 기회를 우리는 수도 없이 놓치고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그저 이기적인 신앙생활, 나의 안녕만을 꾀하는 신앙생활만을 위해 달려오다가 그 어떤 업적도 남기지 못한 채로 빈손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누워있는 마지막 침상이 아무리 코끼리 상아로 만들어지고 그 집이 3층 집이고 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죽을 때에 가지고 갈 것은 그러한 물건들이 아니라 우리가 행한 선행들일 테니까요. 거지를 보고는 무시하고 구두쇠처럼 행동하고 100원 한 푼 주기를 아까워한 우리들입니다. 누군가에게 선심을 쓰는 척 하면서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명예를 누릴 만큼 누린 셈이지요. 우리의 선행들은 모두 떠벌려져 아무런 보상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가올 한 번의 기회가 오늘 주어진 셈입니다. 바로 ‘지금’이 그 기회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가끔씩 영화에서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보스의 신임을 가득히 받던 이가 크나큰 실수를 해서 이제는 직분을 상실하게 될 위험에 처하게 되면 그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마주잡고는 보스에게 간청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라고 말이지요.
우리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려 볼까요? 뭐 여러가지 버전이 있겠지만 일단은 침상에 드러누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그때에 가서야 우리의 삶을 보다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때에 하느님 앞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모든 희망이 꺼지게 되는 그 날, 돈도, 명예도, 미모도, 건강도 소용이 없게되는 수명이 다하는 그 날에 과연 우리의 내면에는 어떤 의욕이 남아 있게 될까요?
어쩌면 우리의 하루하루는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소중한 ‘기회’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하루라는 기회, 이런 기회들이 모이고 쌓여서 우리의 생을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기회들을 허투루 쓰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조금 더 이뻐지려고, 조금 더 유명해지려고, 조금 더 부유해지려고 기를 쓰다가 생을 소비해 버리고 말지요. 아침 햇살을 제대로 누려 본 적도 없고, 아름다운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으며, 사랑하는 아이들의 미소를 여유있게 바라보지도 못하고 아내의 주름진 얼굴을 쓰다듬으며 함께 해 줘서 고맙다는 말 한 번 못해 본 셈이지요.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작은 노력으로 하느님을 알 수도 있었을 수많은 기회들, 그 아름다운 구원의 기회를 우리는 수도 없이 놓치고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그저 이기적인 신앙생활, 나의 안녕만을 꾀하는 신앙생활만을 위해 달려오다가 그 어떤 업적도 남기지 못한 채로 빈손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누워있는 마지막 침상이 아무리 코끼리 상아로 만들어지고 그 집이 3층 집이고 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죽을 때에 가지고 갈 것은 그러한 물건들이 아니라 우리가 행한 선행들일 테니까요. 거지를 보고는 무시하고 구두쇠처럼 행동하고 100원 한 푼 주기를 아까워한 우리들입니다. 누군가에게 선심을 쓰는 척 하면서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명예를 누릴 만큼 누린 셈이지요. 우리의 선행들은 모두 떠벌려져 아무런 보상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가올 한 번의 기회가 오늘 주어진 셈입니다. 바로 ‘지금’이 그 기회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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