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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사명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사명’입니다. 하지만 그 사명이 과연 무엇을 하기 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서로들 의견이 분분합니다. ‘참된 행복’을 찾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면 사명이랄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바라시는 것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누구는 사제가 되고 누구는 결혼을 합니다. 저마다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기쁘게 살아갑니다. 문제는 서로 다른 행복들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욕심을 내느라 정작 자신의 행복을 올바로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행복은 그의 것이고 나의 행복은 나의 것이니까요. 그는 그대로 행복할 자유와 권리가 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각 인간에게 모두 알맞는 틀을 만들어 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같은 아버지를 모신 같은 집안의 형제 자매들이라는 것 뿐이지요.

하지만 하느님 집안 자녀가 아닌 다른 집 자녀들이 있기는 합니다. 성경의 ‘가라지’로 표현되는 이들이지요. 그들의 행복은 남의 불행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남을 불행하게 만드는 걸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니 자신도 결국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그걸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느님 자녀의 행복은 가장 먼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모든 행복이 기원한다는 것을 믿어 알고 있지요. 그리고 아버지의 뜻은 선하신 뜻이었고 당신을 찾는 모든 이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히 일합니다. 바로 이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말이지요. 그 일의 형태는 다양합니다. 어느 하나로 귀착될 수 없습니다. 노래를 좋아하면 노래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이웃들을 초대하고, 글을 잘 적으면 자신이 적는 글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강연을 잘 하면 자신의 강연으로 그렇게 합니다. 저마다 각자가 가진 재주로 하느님을 열심히 찬양하고 기뻐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입니다.

하지만 다른 집 자녀들은 자신들의 기준을 하나로 통일 시킵니다. ‘개개인의 완벽한 행복’을 내세우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피라미드의 꼭지점만이 온전히 행복해 질 수 있다는 논리이고 모든 이들이 이 피라미드 꼭대기를 향한 경주에 동참해야 한다고 합니다. 더 이뻐져야 하고 더 가져야 하고 더 열심히 미친듯이 일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같은 논리를 적용합니다. 더 많은 수의 신자들을 끌어들이고 그것을 데이터로 전환하여 다른 교회를 이겨야 하는 것이지요. 몇 퍼센트가 중요하지 그들이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하는지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아예 고려 대상이 아니지요.

그저 간단한 질문 하나만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지금 기쁘신가요? 행복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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