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버리는 것이지요. 간혹 하느님의 자비를 오버해서 신뢰하는 이들을 만나고는 합니다. 즉 하느님은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시라서 그 어떤 잘못도 용서하시고 결국 우리 모두를 하늘 나라로 이끄신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지요.
이 사람이 하는 표현 중에 하나는 맞습니다. 하느님은 어떠한 잘못도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모두를 ‘억지로’ 하늘 나라로 이끌지는 않으십니다.
도대체 이런 일은 어떻게 왜 일어날까요? 사실 하느님의 섭리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이 듭니다. 하지만 힘 닿는 데까지 알아볼 수는 있습니다.
먼저는 ‘자유’에 관한 문제입니다. ‘하느님은 악을 저지르는 자들을 선으로 돌이킬 수는 없는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자유를 빼앗아가는 순간 인간은 인형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기껏해야 기계 장치를 넣을 수는 있겠지만 인형인 것에는 다름이 없게 되고 말지요. 자기 스스로 선택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하느님이 인간의 자유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모두를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이끌게 된다면 그 순간 ‘사랑’도 동시에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로지 ‘자유’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자유가 없는 사랑은 말도 안되는 말일 뿐입니다.
그럼 선하신 분이 어떻게 ‘악’과 공존할 수 있는가? 어떻게 지옥이라는 것이 선 자체이신 하느님과 공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대두됩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시니 나쁜 선택을 한 자들, 즉 악을 저지르는 이들을 죽음 이후에는 ‘사라지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언제까지 남아 있는가? 하는 문제와 연관시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언제까지일까요? 이 세상에서 살 동안만 자유의지가 있고 저 세상에 가면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죽음을 거치고 나면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존재가 될까요? 천국에 있는 이들은 더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허수아비들일 뿐일까요? 아니면 더욱 더 완전한 사랑으로 하느님을 선택하는 자들일까요?
인간에게 준 자유의지는 영원한 것입니다. 죽음 전에도, 죽음 이후에도 남아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죽고 나서 인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더욱 완전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 ‘잘못을 저지를 자들’을 깡그리 말살시켜버린다면 우리의 자유의지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마치 온실 속의 화초처럼 그저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이고 아무런 의욕 없이 살아가게 되겠지요. 하느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의지는 영원 속에서 계획된 것입니다. 잠깐 빌려 주고 말아버릴 성질의 것이 아니었지요.
하느님은 모든 것이라고 했는데 그럼 하느님 안에 ‘악’이 포함되어 있는 것인가? 이는 우리의 언어적이고 공간적 이해의 한계에서 비롯하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지금 시간과 공간 안에 머물러서 그 안에서 모든 것을 분별하고 바라보려고 하기에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치 A4용지 안에 시커먼 점이 있는 것을 상상하고 있는 식이지요.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손길 안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에게는 그 어떤 어두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저로서는 달리 설명해 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도 시간과 공간 안에 묶인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비록 제주도에 살아도 상상으로 서울을 얼마든지 다녀올 수 있는 것처럼 하느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시는 분이시라 우리가 그분을 시간과 공간 안에 묶어 버리는 순간 우리는 전혀 엉뚱한 존재를 상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와서 말씀을 드리자면, 하느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시는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하느님을 버리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도 꾸준히, 영원히 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를 온전히 이해할 능력이 없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답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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