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 58,6-7)
간단하게 말하면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은 무언가를 참아 견디고 스스로를 괴롭게 만드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적극적인 의미의 고행, 즉 나의 의지를 동원해서 내가 평소에 시도하지 않았던 이웃을 향한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 재의 수요일 단식을 들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식’이라는 말을 듣고 과연 얼마를 굶어야 하는지, 어떻게 굶어야 하는지, 고기는 먹으면 안되지만 콩으로 만든 가짜고기는 먹어도 되는지 등등을 궁금해 합니다. 즉 단식 규정을 철저히 지켜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고는 지극히 이기적인 구원관에서 나온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메뉴얼에 적힌 대로 단식을 지킬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단식이 나의 사랑을 키우지는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신호등을 지켰다고 나의 양보하는 정신이 자동으로 크지는 않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양보는 나의 내적 선함과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단식이 외적인 규정의 준수가 아니라 당신에게 기쁨을 가져오는 것으로 변화되기를 바라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단식을 하는가 하는 것이 또한 우리가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하는가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즉, 하느님이 바라는 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아니면 그냥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우기는지 하는 것을 판가름해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는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을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줍니다. 우리는 그대로 단식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구절에 적힌 내용들을 그대로 실천적으로 적용할 수도 있겠지만 또한 그 내적인 의미를 올바로 깨달아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억압과 멍에가 단순히 손에 채워진 수갑이 아니라, 죄악과 악습으로 억눌린 영혼을 의미할 수 있다는 것, 굶주린 이들이 단순히 육신의 음식이 부족한 이들이기보다 또한 영혼의 양식이 부족한 이들일 수 있다는 것, 떠돌고 헐벗은 이들이 집이 없고 옷이 없는 사람이기도 하겠지만 또한 그 영혼이 머무를 곳이 없고 영혼을 감싸 않을 것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 혈육이라는 것이 피를 나눈 사이이기도 하겠지만 또한 같은 믿음을 나누는 이들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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