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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강의록

선  교


사수성당 마진우 요셉 신부

선교의 부담

선교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부담스러움’입니다. 과연 나 같은 사람이 선교를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지요. 마치 선교는 그에 대한 특별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나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선교는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마치 우리가 숨을 쉬고 밥을 먹듯이 선교는 자연스럽고 신자라면 누구나 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선교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일

먼저는 우리가 좋아하는 일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좋아하는 일, 선호하는 일이 있습니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고, 아름다운 사람과 사귀는 것을 좋아하며, 돈을 벌고 명예를 얻는 것을 즐깁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위해서 얼마든지 기꺼이 시간을 내어줄 생각이y 있으며 그것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그러한 것들을 향한 욕구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을 할 때에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배고픔의 욕구가 있기에 밥먹는 것이 기쁜 일이 되는 것이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욕구가 있기에 잘 생긴 사람을 보면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교에 있어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선교를 향한 욕구를 올바로 갖추는 것입니다. 즉 선교를 하고 싶어하게 되는 것이지요.

영혼이 원하는 것

인간의 내면에는 수많은 욕구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옷을 사는 일이 참으로 중요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맛있는 밥을 한 끼 먹는 것이 중요한 법이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서로 추구하는 욕구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숱한 욕구들 가운데 끼어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우리 영혼이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치 초컬릿을 잔뜩 먹어 입맛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우리는 이 영혼이 바라는 것을 올바로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에 이 욕구는 무시 당하고 말지요.

그러나 모든 인간에게는 영혼이 존재하며 그 영혼은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행복’해지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영혼을 만드신 분은 영혼들이 행복해 질 수 있는 올바른 방향을 만들어 두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찾는 것’입니다.

영혼은 오직 이 방향으로 나아갈 때만 비로소 진정으로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하느님을 대체할 수 있는 수단들을 많이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길을  잃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바라는 것은 ‘행복’해지는 것인데 우리는 그 행복을 전혀 엉뚱한 곳에서 찾고들 있는 셈이지요. 돈과 명예, 권력, 미모와 지상에서의 장수와 같은 가치들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얻지 못해 절망하고 또 얻어도 허무해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절대로 영혼을 채워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그 내면의 공허를 채워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답은 이미 나온 셈입니다. 영혼에 ‘하느님’을 부어주면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두 번째 어려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어디에서 하느님을 찾을 것이며 그 하느님을 영혼에 어떻게 채울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인원 수 채우기와 신앙을 전파하기

하느님은 이런 우리들의 어려움을 잘 알고 계셨기에 당신이 먼저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길을 알려 주셨지요. 그것이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이라는 백성이 겪은 여정이었고 또 신약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열린 길이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길이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지요. 오늘날 우리 교회는 성령의 힘을 통해서 그 길을 계속 걸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을 향해 걸어가는 여정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이루어진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조심성있게 바라보아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물의 세례가 아니라 성령과 불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교회 공동체에 외적이고 형식적으로 속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선교의 구체적인 차이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무턱대고 교회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면, 우리의 선교는 마치 시내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는 것과 비슷한 일을 하기만 하면 됩니다. 광고를 크게 내고 교회 안의 사람들을 닥달해서 신앙이라는 이름을 바탕으로 한 다단계 사업을 하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든 교회 구성원의 숫자는 늘어나고 우리는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통상적인 ‘선교’의 방법인 셈이지요. 특정한 때에 ‘운동’을 펼쳐서 수많은 사람들을 일시적으로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을 이렇게 단순하게 볼 수 만은 없습니다. 물론 이러한 운동은 적절한 시기에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우리는 좀 더 본질적인 ‘신앙 전파’에 대해서 고민을 해 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앞서 다룬 주제를 되살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신앙이 좋은가?

질문은 무척이나 단순합니다.
“나는 신앙인이 되는 것을 좋아하는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그것을 다른 이들도 좋아할 것인가?”
여기에서 잠시 멈춰 서서 이 질문에 대답할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찾아낸 답은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가 신앙인이 되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요? 성당 사람들과 맺는 관계가 좋은 것일까요? 아니면 성당의 분위기가 좋은 것일까요? 혹은 성당에서 얻어지는 어떤 이익이 있나요? 그것도 아니라면 과연 우리는 도대체 왜 성당에 나오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하느님 때문에’ 성당에 나와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좋아하고 그분의 선과 진리와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그것을 얻어 만나기 위해서 성당에 나와야 합니다. 다른 무언가가 그 이유가 된다면 그것은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더욱 특화되어 있고 더욱 나은 모델로 사람들을 자신에게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신앙학교’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성당은 그 특유의 체계적인 구조로 신앙학교라는 프로그램을 세상 그 어느 프로그램에 뒤쳐지지 않게 잘 이끌어 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세상 안에 수많은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불교의 템플 스테이를 답습해서 소울 스테이를 만들어내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이처럼 세상의 어느 부분과 경쟁을 해야 하는 것이라면 일시적으로 좋은 결과를 뽑아낼 수는 있어도 이내 세상은 그것보다 더 뛰어난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말 것입니다. (연도와 상조 서비스)

우리는 우리의 본질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이라는 분에 집중해서 그분을 올바로 사랑하고 온전히 그분에게 마음을 빼앗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 안에 올바른 기쁨과 행복이 자라나게 되고 우리는 비로소 남들에게도 기꺼이 소개할 수 있는 무언가를 지니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는 행위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매력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을 닮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선교의 방법

그렇다면 우리의 선교의 방법은 보다 본질에 충실한 것이어야 합니다. 대뜸 선교 책자를 들고 거리로 나가기 전에 우리는 먼저 우리의 신앙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즐길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작업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나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고 절로 우리와 가까운 이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어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새로운 뉴스를 듣거나 신기한 일들을 보면 친구들에게 드러내고 구경시켜 주고 싶어하듯이 우리에게 다가온 신앙이 정말로 좋은 것이고 남들과 나눌수록 더욱 좋은 것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우리의 신앙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의 이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스스로를 점검해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도 억지로 하는 일을 남에게 떠맡기는 것은 절대로 바람직한 선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칫하다가는 우리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으면서 남들에게 짐을 지우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먼저는 우리가 지닌 것을 소중히 여길 줄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은 좋은 것인가?

이제 우리의 질문은 이어지게 됩니다. 신앙을 좋은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전하자는 취지는 알았지만 이제는 의심이 시작됩니다. ‘정말 신앙은 좋은 것인가?’라는 질문이 튀어나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저마다 다른 고유의 관점을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질문)

이러한 의문이 생겨나는 이유는 바로 신앙을 체험하기 위해서 나오는 교회의 모습이 불완전하고 미흡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때로는 구성원들의 오류가 잔뜩 끼어 있기도 합니다. 신앙을 접하면서 ‘사제의 모습’에서 진실함을 찾았는데 사제가 실망스러웠다던지, 아니면 이웃 동료 신자들에게서 하느님의 맛을 보고자 했는데 그들이 너무 세속적이라 실망스러웠다든지 하는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신앙을 저버리기 시작하게 됩니다.

신앙은 분명 좋은 것이지만 그 신앙을 드러내어야 하는 이들, 즉 교회 공동체는 저마다의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날의 어려움입니다. 속에 아무리 좋은 보화를 지니고 있더라도 외적인 껍데기가 지나치게 상해 있으면 사람들이 그 껍데기를 뚫고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려는 마음을 상실하게 되어 버리니까요.

공동체는 절대로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언제나 어딘가에 부족함을 안고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그 이유를 올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왜 불완전한가?


교회는 도대체 왜 이런 모습인 것일까요? 교회는 왜 이렇게 불완전한 모습인 것일까요? 우리는 이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불완전한 교회의 모습에 실망하지 않게 되고 또 복음을 전하는 데에 있어서도 용기를 낼 수 있게 될 테니까요.

교회에 대한 질문은 다음의 질문으로 바꾸어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의 몸은 완벽합니까?”

과연 우리의 몸은 완벽할까요? 도대체 어떤 모습이어야 완벽한 것일까요? 그리고 언제 완벽해지는 것일까요? 결론은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 한번도 완벽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가 부족하고 모자란 모습입니다. 때로는 병에 걸리기도 하고 신체의 일부를 잃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인격’이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몸이 병들었다고, 우리 몸의 어느 부분이 부족하다고 해서 우리 개개인의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교회는 원래 불완전하게 마련이다

앞서 제시한 몸의 비유처럼 교회는 원래 불완전하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완성된 무언가, 고정된 무언가가 아니라 끊임없이 성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이렇다 하고 고정시켜버리면 그 즉시 죽어 버리게 되는 존재입니다. 교회는 이런 저런 시련들에 대항하고 끊임없는  자가 치유의 과정을 거쳐서 살아있는 존재가 됩니다.

교회 안에는 의인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약한 자들, 아픈 이들, 부족한 이들, 심지어는 죄인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의인들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서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 그분의 아버지께서 원하신 것은 세상의 모든 이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 내는 올바른 이들이 아니라 정반대로 부족하고 나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이들을 위해 다가오셔야 했던 것이고 당신의 제자들도 그런 이들을 모아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역사를 거듭해 이어져 오면서 점차적으로 많은 제도들을 정비해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마치 잘 정비된 무언가가 된 것처럼 느껴지지요. 교회 안에는 법도 있고 이런 저런 예식도 있으며 각 본당은 저마다의 완벽한 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 교회는 어느 순간에도 ‘완전한’ 적은 없었습니다. 지상에서 교회는 어디까지나 순례자일 뿐이며 끊임없이 매 순간의 상황에 따라서 적응해가며 하느님을 따르는 방법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교를 함에 있어서 ‘완벽한 공동체’를 갖추고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불완전함 가운데에서 선교가 더욱 빛을 발한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한 가운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필요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선교의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선교의 핵심 - 사랑

선교는 나에게 없는 무언가를 새로이 끌어 당기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라는 것은 모든 이들이 한님의 자녀로서 하나의 몸을 형성하고 다만 그 가운데에 아직 온 몸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올바로 따르지 않는 지체에 대한 치유의 과정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가 완전하기 때문에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기 때문에 더욱 선교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없는 무언가를 새로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추스려가는 과정입니다. 즉 선교는 우리 몸의 자가 치유 과정과도 같은 것입니다. 성한 곳을 추스리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나약한 부분을 추스리는 것이지요.

이런 의미로 선교를 바라보게 되면 핵심은 ‘사랑’입니다. 선교를 하는 이유는 사랑을 키우고 사랑을 전하기 위한 것이지요. 선교를 통해서 나에게 부족한 사랑을 키우고, 선교를 통해서 사랑이 필요한 이들에게 다가서서 사랑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받고 싶어하지만 사랑을 내어주기는 힘들어 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을 때에 행복해지지만 뭔가 보상도 없는 곳에 나의 사랑을 쏟기는 힘들어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러한 상황이 우리의 선교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 


우리는 사랑이 메말라 있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가뜩이나 부족한 사랑을 주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한계가 있는 사람이며 우리 각자가 지닌 내면의 사랑은 지극히 초라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시선을 들어높여야 합니다. 그리고 보다 넓은 차원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바라보아야 하며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미 베풀어진 수많은 자비를 올바로 인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안에는 우리가 평소에 이미 누리는 것들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지닌 것들, 우리가 이미 활용하는 제도들, 우리가 이미 지닌 학식을 지니지 못한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만일 우리가 정말 끼니를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하느님의 자녀로서 충분한 관심과 보살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우리는 다른 지체를 위해서 기꺼이 내어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믿음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올바로 바라보도록 도와주는 것이 ‘믿음’입니다. 따라서 선교의 바탕은 사랑이며, 선교의 기초는 믿음이 되는 것이지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도와주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믿기 때문에 서로 계약을 맺고 일을 추진합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상태가 지닌 지표가 아무리 객관적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남편이 아무리 외적으로 성실하다 해도 의심을 하게 마련이지요. 우리는 일상 안에서 이 믿음을 근간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희망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유토피아를 건설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시선이 지상을 향해 있으면 우리는 늘 실망만 하게 될 것입니다. 언제나 부족하고 못난 모습만 보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우리의 시선이 보다 높은 곳, 천상을 향해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희망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아직 이르지 못했지만 도달하게 될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힘을 내어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선교의 자연스러움

결과적으로 선교는 더욱 사랑하고 싶은 사람, 더욱 믿고 싶은 사람, 더욱 희망하고 싶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실천하게 되는 삶의 태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선교는 결코 어색하거나 이상한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가 폐에 숨을 불어 넣기 위해서는 숨을 쉬어야 하고,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걷기 시작해야 하며, 우리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서는 밥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선교는 우리가 하느님에게 함께 나아가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야기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선교를 하지 않으려는 이, 즉 저 혼자 미사에 나가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착각하는 이는 사랑이 필요없는 사람이며 믿지 못하는 사람이며 희망하지 못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는 최소한의 규정을 겨우 채우려는 사람이며 하느님을 구원 장사꾼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특정한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사라고 강요하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분이시며 다만 그 행복의 범위가 특정 범주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미치기를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자녀에게 선교라는 것, 즉 복음을 전하고 기쁜 소식을 알리는 것은 자신의 아버지가 하느님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선교를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제이고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오지 않고 할 수 없다고 삼가할 수 있었지만 저는 기꺼이 승락을 했고 여러분들의 앞에 서서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여러분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선교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체적인 몇가지 조언

선교를 한다는 것을 특정한 외적 행위로 제한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선교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동료들 앞에서 선교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교의 방법이 주일 미사를 가자고 억지로 끌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회사에서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성실히 직무를 수행하면서 선교할 수 있습니다. 또한 내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느님에게 드리는 감사를 바탕으로 기꺼이 희생할 수 있습니다. 매일같이 만나는 직장 동료들에게 친절과 온유의 모습을 보일 수 있으며 아무도 함께 하지 않으려는 고약한 직장 상사에게도 온유와 인내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직장 안에서의 선교의 바탕이 됩니다.

물론 결정적인 순간에 ‘초대’는 필요합니다. 빛을 늘 비추는 것도 필요하지만 준비된 열매를 추수하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물론 그 시기와 때는 저마다 분별해야 합니다. 본당에서 때로 실천하는 선교 주간에 맞추어 사람들을 초대할 수도 있고 예비자 교리반이 개설되는 시점에 맞추어 미리 보아 두었던 이를 초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초대는 미리 실천하는 선교의 마지막 결과물일 뿐입니다. 우리의 선교는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으며 그 ‘전(前)선교’야 말로 선교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어당기거나, 혹은 내가 하기 싫어하는 선교를 억지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빛을 보고 자연스레 이끌려든 사람을 맞아들이는 것 뿐이며, 내가 정말 사랑하고 좋아하는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 전해주는 마음으로 선교의 초대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얼마나 좋으신지 알아야 합니다. 그러고 나면 선교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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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