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가 없는 채로 현세의 고통을 참아 견디도록 종용한다면 그것은 헛된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고 단순히 현세의 고통만을 경감하는 역할을 하는 아편이다.
하지만 다가오는 실체가 분명한 것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기다리라고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희망이 된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는 부르짖음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믿지 않는 자는 아무리 외적으로 신앙적인 표지를 잔뜩 지니고 있어도 결국에는 자신의 불신앙의 벽에 부딪히고 만다. 반대로 믿음을 올바로 지닌 자는 외적으로 아무리 험한 일을 당해도 결국 자신이 가야 할 곳에 가 닿게 된다.
우리가 믿는 것은 허황한 이야기들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다가올 실체들이다. 신앙인은 그 믿음을 고백하는 자이어야 하며 세상에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는 존재들이다.
세상은 끊임없는 투쟁과 다툼으로 자기 앞에 놓인 현실도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흥분해 있는 동안에는, 또 어딘가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는 진리를 올바로 바라볼 수 없다.
마음을 추스리고 진리와 대면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진리, 즉 우리가 나약하고 부족하다는 것부터 올바로 직면해야 한다. 바로 거기에서 바른 방향성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없는 마음에 진리가 스며들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느님이 없는 마음에는 반드시 다른 대체재가 그 안에 준비되어 있고 그러한 대체재는 반드시 어딘가 엇나간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게 되기 때문이다.
나침반이 잘못되어 있는데 그것을 열심히 따라가 본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먼저는 나침반을 수리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우리는 다가올 분명한 실체, 즉 영원 안에서의 만남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이 현세를 올바로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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