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40)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가장 손쉬운 방법,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 이들과 만나기…
그럼 누군가가 반드시 물을 것입니다.
“누가 가장 작은 이들입니까?”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 이들을 찾는 법은 우리의 세상적 자아가 거부하지만 천상적 자아가 다가서기를 원하는 이들을 찾으면 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에게 두 자아가 분열되어 있기라도 하냐고 물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길가다 걸인을 만나면 우리의 천상적 자아는 그 즉시 ‘불쌍함’, ‘동정’을 느낍니다. 이 추운 날 한길에 나앉아서 구걸을 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보이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세상적 자아는 그 즉시 반대 의견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우리의 내면의 흐름에 저항하는 ‘이론’을 찾아냅니다. 그는 원래 가난하지 않다는 둥, 전에 텔레비전에서 봤는데 대부분의 이런 경우가 사기꾼들이었다는 둥, 인터넷 사이트에서 이런 종류의 체험담을 읽은 적이 있다는 식의 반발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분별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이런 반발은 실제로 그러한 내용들에 설득되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내면의 ‘돈을 아까워하는 마음’과 ‘남들 앞에 나서 누군가를 돕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별하게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말지요.
굳이 걸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 안에서 이런 일들을 자주 체험합니다 특히나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서 이런 일들을 체험하곤 합니다. 우리의 늙으신 부모님, 우리의 아내와 남편, 우리의 자녀들에게서 이런 일을 체험하지요. 그리고 우리가 자주 만나는 친구들 가운데에서 볼품 없는 이들, 성격이 모나서 아무도 다가서려 하지 않는 이들을 바탕으로 이러한 체험을 합니다.
우리는 누가 우리 주변의 가장 작은 이들인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들이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엉뚱한 이들을 가장 ‘쉬운 방법’으로 도우면서 양심의 불을 끄려고 노력하곤 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의지가 소요되는 일입니다. 가장 쉬운 일은 나에게 남는 무언가를 내미는 것이지요. 어려운 일은 내 의지가 쉽게 자발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일입니다. 거기에 바로 나의 가장 작은 이들이 존재합니다.
누군가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 우리의 용서와 사랑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이들. 그들이 우리의 가장 작은 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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