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이사 42,6-7)
색맹은 색을 보지 못합니다. 눈 앞에 사물이 있어도 색을 구분해 내지 못합니다. 그 외적인 형태는 볼 수 있지만 그 다채로운 색깔은 전혀 보지 못합니다.
신앙의 눈이라는 것은 인간의 외적인 모습을 넘어서서 그 내면의 향기를 분별해 내는 것을 말합니다. 외면이 초라해도 그 내면의 향기가 뛰어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반대로 외면이 화려해도 그 내면이 썩어 문드러진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빛이십니다. 그 빛은 우리의 내면을 비추어 우리가 내적으로 아름다운 사람이 되도록 도와줍니다. 주님은 우리가 착한 사람, 공정한 사람, 진실한 사람,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도와줍니다. 그리고 그러한 내면의 가치는 외적으로 절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외면 만을 보고 그를 분별하게 됩니다. 그런 그들은 장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외적으로 화려한 것들 중에는 역으로 우리를 어둠으로 이끌고 가는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아내를 둔 남자가 유혹을 당하는 데에는 아름다운 여인, 그러나 그 내면의 마음이 어긋난 여인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탐욕에 빠지는 데에는 외적으로 화려한 재물들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명예욕에 빠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찬사가 필요합니다. 이처럼 모든 유혹의 외면은 화려하고 따라서 사람들은 그 유혹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인간을 속박합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그 죄의 종이 되게 됩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그 거짓말에 묶여 살아가게 됩니다. 하느님보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돈에 속박을 당합니다. 죄가 없는 사람은 오직 전능하신 하느님 한 분 만을 세상의 주인으로 두고 살아가며 나머지는 모두 자유로이 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많은 사람은 하느님을 등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다른 강한 것들이 다가오면 그것에 구속을 당하게 됩니다.
이들이 이렇게 죄에 빠지는 이유는 장님이기 때문이며, 빛을 알아차리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복잡한 미로같은 감옥에서 빛도 없이, 도움도 없이 빠져나오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 길을 인도하게 하시고 빛을 밝혀주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더 똑똑하다고 생각했고, 자기 스스로 이미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은 하느님 가장 가까이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사람에게 더 많이 일어났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집니다. 성전의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지식으로만 구세주의 탄생을 논했고, 목동들과 멀리서 온 동방 박사들이 주님을 경배한 것처럼, 오늘날에도 자신이 신앙 가장 가까이 머무르고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을 제쳐두고 멀리서 사람들이 주님의 참된 빛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작은 별빛 하나로도 뜻이 있는 사람은 길을 찾습니다. 하지만 눈이 먼 사람은 아무리 강한 빛을 비추어도 제 스스로 감은 눈을 뜨기 전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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