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고, 하느님께 속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진리의 영을 알고 또 사람을 속이는 영을 압니다. (1요한 4,6)
요한의 서간은 우리에게 분별을 가르쳐줍니다.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고 누구의 말을 듣지 말아야 하는지를 간단 명료하게 알려주지요.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말을 듣고 그와 어긋나는 가르침을 피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말은 간단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그분에게서 온 당신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보다 간단히 요약하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을 따르게 됩니다. 반대로 그것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이 진리의 영에서 벗어난 이들이 자신의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속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속이는 자들의 탓만이 아닙니다. 그 속이는 자들의 말을 듣고 싶어하는 이들의 내면도 문제입니다.
누군가가 서로 사랑하자는 말을 할 때에 다른 누군가는 ‘지금은 사랑할 때가 아니라 싸워 이길 때이다.’라고 말을 하면 그 말을 더욱 선호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 투쟁을 향한 불씨가 활활 타오르기 때문이지요. 적대감과 증오, 분노가 가득 들어있어서 그런 종류의 가르침에 더욱 장단이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네들끼리 세력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추종 세력을 끌어들이기 시작하지요. 시대별로 수많은 세력들이 형성되었고 그들은 종교라는 것이 자신들의 주장에 합당한 듯 보이면 지지하다가 그렇지 않은 듯 보이면 가차없이 내치기도 합니다. 그들은 ‘~주의’에 빠져 있는 이들이고 참된 신앙에 대한 성찰이 부족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길을 가게 될 것이고 결국 그 길의 마지막에 예비된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추상적으로밖에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공연히 그들을 화나게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예수님도 비유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해서 공연히 분노를 살 이유는 없었으니까요.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알아 들을까요? 그분의 사랑의 메시지와 십자가의 희생의 메세지를 알아 들을까요? 아니면 유다 이스가리옷처럼 세상의 힘있는 왕을 원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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