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마르 4,40)
알지 못하는 만큼 겁을 냅니다. 뻔히 아는 것을 겁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동물들은 처음 대하는 것을 경계하고 바라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것에 익숙해지면 더는 경계하지 않습니다. 어제 고양이를 데리고 동물병원에 갈 때도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처음 차를 탄 고양이는 몸이 바짝 얼어 긴장하고 아주 조심스레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지만 잠시 시간이 지나 어느정도 익숙해지고 난 뒤에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것에 겁을 냅니다. 특히나 가장 겁이 나는 것은 ‘생명을 잃는 상황’이지요. 사실 수많은 것들이 최종적으로는 여기에 연계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겁을 내기 시작합니다. 예컨대 직장을 잃는 것이 왜 겁이 날까요? 직장을 잃으면 돈 벌 수단을 상실하고 돈이 없으면 생존과 관련된 여러 것들이 위협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겁’은 우리의 ‘죽음’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것이 아직은 미지수이기 때문이고 또 언제나 죽음의 주변에는 ‘고통’의 향기가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고통받기 싫어하고 죽기 싫어하기에 겁을 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 두 가지, 즉 고통과 죽음을 극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을 비참의 상태에서 진정으로 구원하는 이름은 이 이름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생에서 다가오는 고통에 대한 전혀 새로운 의미를 열어주셨지요. 그래서 그분의 길을 따라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사람, 즉 스스로 고통을 껴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 얻게, 즉 죽음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올바로 이해하면 할 수록 우리는 겁을 상실하게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모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보다 신중하고 분별있고 사려깊게 되는 것이지요. 그 어떤 극악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정신을 가다듬고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지를 성찰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믿음 안에서 마음의 안정을 누릴 수 있게 되지요.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아편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고통에 신음하고 날카롭게 신경을 고두세울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향한 신뢰 안에서 밤잠을 편안히 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종교가 절대로 아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겁많은 세상 속에 고개를 들어 높이는 자랑스러운 믿음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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