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미사를 마치고 한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사정을 설명합니다.
“신부님, 집에 이런 저런 일이 있는데요. 혹시 돈을 좀 빌려 주시면 안될까요?”
그래서 안된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돈을 쉽게 빌릴 수 있는 은행이 아니라고 했지요. 겪고 있는 일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돈을 빌려 주는 것은 상태를 개선시키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악화시킬 수 있다고 해 주었습니다.
선교지에서 언제나 일어나는 일, 선교지에서 어느 선교사든지 빠지게 되는 유혹 가운데 하나는 ‘물질 선교’입니다. 일단 외국의 부유한 나라에서 일하러 와서 적어도 자금 면에서 고통 당하는 일이 없고, 또 한국의 어느 본당에든지 가서 불쌍한 모습을 보이면 도와 주려는 사람이 쇄도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선교사는 이런 유혹에 쉽게 빠지게 됩니다. 즉, 자금을 끌어와서 쏟아 부으면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려는 유혹이지요. 이런 저런 ‘자선사업’을 구상하고 건물을 지을 궁리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자금은 전부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외지에서 들여오는 것이지요.
이런 물질선교는 그 결과가 빨리 나타납니다. 즉,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고 돈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교회를 가득 채웁니다. 뭔가 떡고물 떨어지는 일을 기다리고 언제든지 기회가 되면 손을 벌리기 위해서 모여드는 것이지요. 처음 선교를 와서 말도 제대로 안되는 상황에 사람들이 북적대는 교회를 보는 것은 흐뭇한 일이지요. 또 일단 기본적인 겉모습은 가난한 이를 돕는 것이니 스스로도 뿌듯함을 느끼고 나아가 대외적으로도 뭔가 이루어 놓은 것처럼 자신을 드러낼 수도 있고 하니 그 단 맛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그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셈입니다.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하고, 돈으로 흥한 자는 돈으로 망하는 것이 세상 논리이듯이 마찬가지로 돈으로 하는 선교는 그 한계가 분명하게 됩니다. 돈으로 숫자를 불린다고 해서 그들에게 신앙이 생기는 법은 없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꾸준한 모범과 가르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헌데 그것을 도외시하고 일단 사람들의 욕구를 불러 일으키는 매력적인 재화로 사람들을 끌어다 놓았으니 남은 일은 그 공동체 안에서 관찰하게 될 분열과 시기, 다툼과 경쟁 뿐입니다. 언제나 돈을 끌어다주는 주임 신부, 또는 선교사 곁에 가까이 머무르기 위해서 서로 잘 보이려고 하고 그 이면에서는 서로를 음해하는 모습이 심심찮게 보이게 됩니다. 또 그 중심에 있는 사제나 선교사도 절대로 안전하지 못합니다. 달디 단 사탕을 줄 때에는 그를 사랑하는 모습을 내비치던 사람들이 더 이상 그 사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포악한 야수로 변해 버리고 맙니다.
선교는 절대로 물질로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선교는 진실한 가르침과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쉽지 않은 길입니다. 왜냐하면 현지에 익숙해져야 하고 언어와 문화를 올바르게 습득해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교사 자신 안의 신앙이 굳게 세워져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을 세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고 아무리 외쳐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교사라는 이름으로 외지에 온다 하더라도 신앙을 올바로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나아가 자신에게 없는 신앙을 건네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돈이라는 우상을 숭배하게 되는 것이지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이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그 잠시 동안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보여 주면서 그들의 환심을 산 것과 같은 모양새인 것입니다.
쉽고 빠른 길을 선택해서는 안됩니다. 꾸준하고 느리지만 안전하고 확실한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길이고 사랑의 길입니다. 세상 곳곳에 머무르시는 선교사님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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