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마르 4,11-12)
이 구절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그들이 이해하고 싶은데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마음이 없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이해하고 싶은데 하느님께서 가로막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안에 이해할 의도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알아듣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그들은 보고 듣게 되어 마음이 돌아오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해할 마음이 없었고 마음을 바꿀 의도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히 현학적으로 그들에게 다가갔을 뿐입니다. 모든 것은 수수께끼처럼 들렸고 비유 자체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 비유 안에 들어있는 속 뜻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제자들’ 즉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서 올바로 알고 그분을 따르려는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다시 묻고 물어 결국에는 그 뜻을 파악하게 됩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지나치지 않고 다시 그 뜻을 파고들고 파고들어 결국 그 안에 포함된 보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지요.
신학을 배우는 평신도의 예를 들어 봅시다. 그가 진정 배우려는 것이 예수님인가 아니면 단지 신학을 배워서 자신의 학식을 높이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가 하는 데에서부터 근본적인 노선의 차이가 존재하게 됩니다. 정말 신학을 통해서 하느님을 더 알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배움에서 실천할 거리를 발견하고 더욱 겸손해지고 사랑을 완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배움을 통해서 자신의 위신을 높이려는 사람은 더욱 교만해지고 하느님에게서 더욱 멀어지게 됩니다. 신학을 배움으로 인해서 한 사람은 하느님을 알게 되고, 다른 한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더욱 멀어지는 것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배우고 싶은 사람은 길을 가다가 만난 풀꽃에서도 배울 것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 속에서도 하느님의 지혜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배울 마음이 없는 이들은 자신보다 현학적이고 지식 과시형의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쉬운 방법으로 가르쳤습니다. 가장 낮은 지식 수준을 가진 사람이라도 알아 들을 수 있는 가르침을 전하셨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디에 서 있을까요? 우리는 배울 마음이 있을까요? 우리는 들은 것을 올바로 이해하고 다른 이들에게 가르칠 마음이 있을까요? 지금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오늘 배운 것을 누군가에게 전할 용의가 있으신가요? 아니면 남는 시간에 마땅히 할 것이 없어서 이 글을 읽고 계신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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