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수많은 걱정거리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걱정거리는 사람의 능력치에 따라서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높은 장애물도 거뜬히 뛰어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이 작은 단을 올라가는 것을 힘겨워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어린 아이가 해야 할 걱정일 뿐입니다. 이처럼 각 인간의 내면의 영혼은 그 수련 단계에 따라서 걱정거리가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자기 자신의 문제에 골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언제나 이웃을 돌아보고 이웃의 필요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적인 어린아이와 어른의 차이이지요. 어른이 된다는 것은 제 스스로의 일을 알아서 하고 나아가 다른 이를 책임질 나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어른은 이미 자신의 일로 고민하지 않고 오히려 주변의 영혼들로 고민을 합니다. 그 영혼들을 하느님께로 이끌기 위해서 고민을 하지요.
영적 어른들이 보기에 어린 아이들은 고민 같지도 않은 고민으로 공연한 내적 힘을 소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아이들이 고민하도록 내버려둡니다. 아직 성장하지 못하고 미숙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아이들은 열심히 고민하고 기뻐하거나 슬퍼하다가 다시 새로운 고민거리를 만나 고민을 시작하곤 합니다.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내어주면서 아이들이 성장하도록 돌보지요.
어린 시절 하던 고민을 어른이 되어서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플레이 스테이션을 살까 엑스 박스를 살까 하던 고민을 어른이 되면 더는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예 게임을 손에서 내려놓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세상에는 몸은 나이가 들어 50, 60이 되어도 여전히 영은 미숙한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30년 전에 하던 고민을 여전히 하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만 그 외적 형태만 달라졌을 뿐, 내면으로는 하나도 변한 게 없는 고민입니다.
때로 이런 영적 어린아이들이 어른이 아는 거룩한 ‘정보’를 알았다고 어른을 가르치려고 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아는 게 아닙니다. 그냥 주워 들은 것일 뿐이지요. 그들 안에는 자신들이 정보로 아는 것이 하나도 형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들이 재잘대는 말을 듣기는 하지만 그 아이의 상태를 이미 알고 있게 마련입니다. 아이들은 그저 주워 들은 대로 말하기만 할 뿐 그것을 올바로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 대해서 책을 읽을 수는 있지만 중요한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인내와 겸손’을 배울 수는 있지만 실제 생활에서 전혀 인내롭거나 겸손하지 않는 경우도 있게 마련입니다. 아니, 오히려 인내를 배웠다고 교만해지는 수도 있습니다. 그 밖에도 수많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때가 이르면 아이는 자라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아이로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아이는 때가 이르러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때라는 것은 단순히 외적인 시간의 흐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때라는 것은 충만의 시기, 인간의 내면이 성장하고 무르익는 시기를 말합니다. 헌데 때가 이르렀는데도 자라지 않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아니 자라기보다는 오히려 퇴보하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어둠에 사로잡힌 영혼들도 있고, 자신이 어둠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거룩하다고 착각하는 심각한 영혼도 있습니다.
인간은 훗날 하느님 앞에 나아가게 되고 그분 앞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모든 영혼을 샅샅이 알고 그에 합당한 도움을 내려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우리 주변에 다가온 도움들, 그리고 우리가 받아들이거나 물리친 도움들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못된 어린 아이는 엄마가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으라 해도 사탕을 먹겠다고 우겨댈 뿐입니다. 엄마는 참고 인내하고 다시 아이를 구슬리고 때로는 훈계도 하지만 과연 그 아이는 결국 사탕을 버리고 엄마가 준비한 영양가 풍부한 음식을 즐기게 될까요? 두고 볼 일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