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우리를 언제나 선택의 중심에 두십니다. 우리는 선택을 할 때에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을 수 있는 중립의 위치에 있게 됩니다. 악인도 선택을 할 때에는 올바름과 그릇됨의 중간에 위치하게 되고, 선인도 선택을 할 때에는 올바름과 그릇됨의 중간에 위치하게 됩니다.
악인이라고 해서 선을 선택하는 데에 장애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반면 선인이라고 해서 악을 선택하는 데에 장애가 되는 것도 없지요. 다만 이미 내면에 선호도가 생겨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선호도가 선택의 중립성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은 악인에게는 ‘기회’가 되고, 선인에게는 ‘훈련’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악인이 악만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면 하느님 앞에서 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대부분의 악은 초창기의 선택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악인은 가장 극단의 상황에서도 선을 선택할 여지가 남아 있습니다. 반대로 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인이 선을 선택할 때에는 그래야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 의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선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인이 선을 선택할 때에는 언제나 그만한 의지의 자발적인 헌신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가 상을 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겠지요.
한 사제가 사목을 할 때에 그가 사제라고 해서 선의 선택을 보장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제는 늘 물질의 유혹, 이성의 유혹, 명예의 유혹, 권력의 유혹에 시달리게 됩니다. 즉, 일을 쉽게 하고 싶고 육신을 안락하게 하고 싶은 유혹에 늘 시달리는 것이지요. 그러한 가운데 자신의 선택으로 다시 사목에 헌신하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며 양들의 목소리를 듣고 양들을 이끌어 푸른 초원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악인이라고 해서 회개의 기회가 끝난 사람은 없습니다. 악인이라도 마지막까지 하느님을 선택할 기회가 열려 있게 됩니다. 죽기 일보 직전이라도 진정한 회개를 한다면 하느님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 참으로 적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마지막 한숨을 쉬는 순간까지 그에게 이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그러나 악인들은 그간 자신이 이끌어 온 삶을 바탕으로 다가오는 수치스러움에 스스로 그 기회를 저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참으로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극단의 선택에 이르기 전까지 우리에게는 수많은 선택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우리는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릇된 선택도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인간은 무엇보다도 배우는 존재, 습득하는 존재라서 자신이 한 선택의 결과를 통해서 그 선택을 분별하게 되고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을 피하고 득이 되는 것을 취하게 마련입니다. 악인들이 더 악에 집착하는 이유는 악한 선택이 자신들에게 ‘좋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선인들이 선에 다가서는 이유는 선한 선택이 자신들에게 보다 ‘좋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렇게 내면의 흐름이 형성되어 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언제나 양자를 향해서 환히 열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선택의 여지는 우리의 죽음과 함께 끝나버리고, 죽음 이후에는 우리 내면에 형성된 흐름에 따라서 영원의 시간으로 굳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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