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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 고해성사, 미사


제가 남편 땜에 성사를 네 번이나 봤어요.근데 성사를 보고 나서 좀 나아져야하는데 제 맘은 성사 보기전과 똑같아요. 시간이 흘러 이제는 그것이 무뎌져 죄인 줄도 모르겠어요.하지만 힘든건 여전하거든요. 저희 본당 신부님께 (상담을) 부탁 드려었는데 바쁘신가봐요.연락 주신다고 하셨는데 여전히 답이 없으셨어요. 지금 현재로써의 남편은 모든것이 다 싫어요. 먹는거 자는거 난 힘든데 자신은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거 꼭 절 무시하는 느낌이 들어요. 처음엔 너무 힘들어서 잠도 못 자고 밥도 안  먹은채로 회사 출근 했어었거든요. 지금은 물론 그 정도는 아니지만요. 이러는 제가 싫어서 평일미사 두 주나 드리지 않았어요.저 힘들어도 평일미사 매일 드렸었거든요.

1) 상대를 향한 미움의 씨앗과 그 나무

2) 고해 성사에 관한 문제(올바른 뉘우침)

3) 힘들 때에 미사의 가치

먼저 일이 일어난 순서대로 해서 정돈을 해 보면 가장 먼저는 남편을 향한 어두운 마음의 시작을 들 수 있습니다. 두 분은 물론 사랑으로 첫 시작을 하셨을 것이고 지금의 상태는 어느 순간부터 시작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첫 이유가 있을 것이구요.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그 첫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그 원인을 제공하는 이에게 있다기보다 그 원인에 준비되어 있지 않고 올바로 수용하지 않는 본인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분위기가 좋을 때에는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꾸며져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장미꽃으로 다가오지 않고 설령 그렇게 다가온다 할지라도 장미꽃이 물리고 지겨워지기 시작하면 세상은 지옥으로 변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문제는 내 주변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마음 자세에 있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주변에 늘 나에게 필요한 존재를 배치하신다는 굳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남편은 자매님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앙인은 사랑하는 사람, 사랑을 배우고 훈련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 신앙인 앞에 사랑을 쏟아 부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좋은 훈련 거리가 되는 것이지요. 특히나 배우자는, 즉 일생을 함께 살기로 상호간에 약속을 하고, 신자라면 특히나 하느님 앞에서 약속을 한 두 사람은 그 훈련을 위한 최적의 조건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서로 부딪히고 깎여 나가고 하면서 사랑을 반복해서 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싸움은 언제나 교만을 기반으로 일어납니다. 내가 상대보다 낫다는 생각, 반대로 상대가 나보다 못하다는 생각(지적, 윤리적, 그 밖의 모든 차원에서)은 언제나 내가 상대와 다투게 만드는 것이지요. 우리는 겸손할 필요가 있고 나아가 사랑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이 나에게 껄끄럽게 느껴지는 사람은 나 자신도 역시 남에게 껄끄럽게 느껴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늘 겸손한 마음으로, 특히 하느님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다음 주제는 고해성사입니다. 우리가 성사를 올바로 본다면 우리의 마음은 그 순간 개운해집니다. 성사를 거듭 보아도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올바로 뉘우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고해성사는 마치 수술과도 같습니다. 올바른 수술을 받기 위해서는 나의 환부를 올바로 살피고 의사 앞에 드러내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부끄러워서 지극히 일부만을 내밀게 되면 의사로서는 환자가 내미는 부분만을 치료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근본적인 치료가 되지 않는 셈이지요. 고해성사를 받을 때에는 우리가 죄인임을 올바로 상기해야 합니다. 내가 죄를 짓도록 원인을 제공한 이에 대한 비난을 품고 고해를 볼 것이 아니라 나의 부족함을 하느님 앞에 숨김없이 드러내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사’의 가치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이들에게서 존경과 찬사를 받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구세주’로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힘들고 지치고 유혹에 빠지고 악에 떨어질 때에 그분을 바라보라고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의인이 당신을 찬미할 때보다 죄인이 뉘우치고 회개하고 도움을 요청할 때에 더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잃었던 양을 찾고 잃었던 은전을 찾을 때에 더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힘들 때에 미사를 소홀히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더 열심히 미사에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대죄 상태에 있지 않는 이상은 성체를 모시고 힘을 얻어 더욱 하느님을 사랑할 작정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성체 성사를 제정한 이유입니다. 당신의 현존을 언제라도 느끼라는 것이었지요.

(답변이 없으신 본당 신부님에 대해서는 제가 대신 사과를 드립니다. 이런 저런 일들 때문에 바쁘실 수도 있고 그 밖에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을테지요. 모쪼록 판단하는 일은 하느님에게 맡기고 신부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마음을 잃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라고 하느님은 저를 통해서 이 답변을 작성하게 하시는 것이니까요. 마음 속에 그 어떤 증오나 원한의 조각도 남겨 놓지 않게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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