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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소중한 당신(2016년 2월)' 제2화 저는 선교사입니다.

제2화 저는 선교사입니다.

과거 제가 선교에 대해서 지니고 있던 첫인상은 ‘부담스러움’이었습니다. 선교라는 것은 대놓고 길에 나가서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 성당에 가자고 졸라대는 제한된 모습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저의 첫인상을 형성하는 데에는 당시에 유행하던 길에 나가서 선교하자던 운동의 영향도 컸습니다. 참된 선교의 모습이 무엇인지 깨닫기도 전에 제 마음 속에 그런 부담스러운 첫인상이 박혀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선교는 언제나 특별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나 하는 것, 정말 용기가 엄청난 사람이 하는 특별한 활동이라는 생각이 가득했었습니다. 다른 말해 선교는 내가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가득했지요.

서품을 받고 나서 새 사제 학교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하루 동안 교육을 받고 길거리에 나가서 선교를 체험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의 저로서는 그것만큼 힘든 일이 없었습니다. 저부터도 길거리에서 저에게 다가와서 전단지를 불쑥 내미는 사람을 만나면 참 어색하고 부담스러움을 느꼈기에 당연히 제가 직접 나가서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선교책을 내미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직접 해보고 나서는 이런 종류의 선교는 제 성격과는 너무나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우리의 몸의 각 부분이 저마다 맡은 역할이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에게 합당한 선교의 자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눈은 사물을 바라보라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코는 냄새를 맡으라고 있는 것이지요. 손은 물건을 붙들고 일을 하라고 있는 것이고 발은 바닥을 디디고 온 몸을 떠받치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에 합당하게 그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의 온 몸은 같은 방향을 향해서 걸어가지만 그 걸어가는 동안 눈은 앞을 주시하고 코는 냄새를 감지하며 손은 필요한 일을 하고 발은 열심히 온 몸을 지탱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선교를 하지만 누군가는 최전방에 나서서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는 제가 맡은 직분 안에서 할 일을 열심히 하면서 선교사들을 돕고, 또 다른 누군가는 기도로 이 모든 지체를 지탱해야 하는 것이지요.

모르는 사람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는 일, 즉 전교를 하는 일은 선교에서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선교는 사실 그 이전부터 서서히 준비되어 가는 것입니다. 선교는 뜨거운 난로에서 열기가 주변으로 전해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난로를 잘 데워 놓아야 그 다음 단계로 그 열기가 주변으로 전해질 수 있는 것이지요. 열기도 없이 나가서 전해 줄 수 있는 것은 없는 셈입니다. 우리는 우리 내면 안에 가장 최우선적으로 신앙의 뜨거움을 간직하고 키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교는 가장 기초적인 복음화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올바로 알고 그 신앙을 조금씩 실천해 나갈 때에 그 결과물이 최종적으로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지요. 마치 예수님이 사람들을 치유하고 나서 시키지도 않았는데(오히려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렸는데도) 사람들에게 나아가서 자신들이 체험한 것을 외쳐 댄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 안에 뜨거운 기쁨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외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것이지요.

해외 선교사로 선교를 하는 손쉬운 방법이 존재합니다. 바로 이든 저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물질적인 것을 나눠주면 되지요. 선교사가 본국에서 엄청난 기부금을 끌어당겨 선교지에서 무언가를 지어주고 나누어주고 하면 당장에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리고 선교지가 사람으로 넘쳐나지요.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거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해 듣고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해서 다가오는 이들이 아니라 세속적인 필요에 의해서 다가온 이들에 불과합니다. 그런 초대는 일시적인 수단은 될 수 있지만 영속적인 선교의 모습은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심한 경우에는 오히려 선교에 장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선교사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부자’로 비치게 되면 외적인 모습으로는 선교사 주변에 사람이 넘쳐나지만 실제적으로 그 선교사는 도리어 사람들을 잃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셈입니다.

제가 처음 이곳에 와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수시로 저를 찾아 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톨릭 사제로서의 저를 찾는 것이 아니라 ‘돈 많은 외국인’으로 저를 찾고 있었습니다. 처음 몇 번을 열심히 도와주었지만 그들은 나날이 감사하기는 커녕 도리어 모든 것이 자신들에게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정작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려고 할 때에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대부분이었지요. 자신의 입에 단 것은 받아 먹으려고 하는데 정작 복음을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도전 앞에서는 모두 도망가 버리곤 했지요.

그래서 저는 선교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만 했습니다. 더는 사람들의 물적 욕구를 통해서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진정한 내면을 통해서 그들에게 다가서고 삶의 변화를 시도하려고 했지요.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가장 최우선적으로 나 자신의 참된 변화가 필요했습니다. 나는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해 신앙인인가를 되새겨야 했지요. 그리고 보다 본질적인 것을 찾아 일에 착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우선적으로 나의 삶을 변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우선적으로 나 자신의 복음화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나를 위해서 하던 일을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일로 바꾸기 시작했지요.

사람들의 변화는 적은 수였고 더디었지만 뚜렷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더는 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세상적 이득을 얻기 위해서 저를 찾는 일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 주변에는 ‘배우려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지요. 그에 따라서 제 일도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최소한의 것만 하려고 애를 썼는데 이제는 나서서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마다하지 않았지요.


이것이 바로 제가 선교를 사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저에게 특화된 모습일 뿐이지요. 핵심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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