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는 왜 부자일까요? 너무나 단순한 질문입니다. 부자가 부자인 이유는 ‘많이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들은 어떻게 해서 많이 가질 수 있게 되었을까요? 먼저는 많은 것을 받기 때문에 그러할 수 있습니다. 즉 본인이 의도한 바가 아닌데 많이 얻게 된 케이스가 있을 수 있지요. 반대로 자신이 간절히 원해서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으고 쌓아서 부자가 되려고 작정하고 부자가 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럼 그 가진 것으로 과연 무엇을 할까요? 흔히 우리가 부자를 동경하는 이유는 그들이 누리는 사치와 쾌락 때문입니다.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야고 5,5) 그들의 호화스러운 삶이 부러워 보이고 그들이 누리는 쾌락과 안락을 향유하고 싶은 마음에 우리는 그들을 부러워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부자들은 이렇게 자신의 부를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전혀 다른 의미의 부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맡겨진 재물을 관리하는 이들입니다. 즉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이 자신의 소유가 아님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이지요. 그들은 자신이 맡은 동안 최선을 다할 뿐이고 그 재물을 맡긴 이의 원의를 잘 알고 그에 따라서 재물을 책임감 있게 써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이들입니다. 물론 통상적인 부자들 가운데 이런 인식을 지닌 이들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자이지만 마음이 가난한 이들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소유한 것이 결국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고 우리는 가난한 이라는 것을 잘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지요. 이런 사람은 외적인 것에 좌우되지 않고 누구든지 만나서 어울릴 수 있고 그들과 친교를 나눌 수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부자들의 초대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세리 마태오의 초대를 받아 식사를 나누었고 자캐오의 집에도 찾아 갔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것이 오직 자신에게만 쓰여져야 한다고 굳게 믿는 이기적인 부자들이 있으니 그들은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부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지닌 부유함으로 인해서 가난한 이들과 수준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누린 수많은 기회 덕분에 지금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전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아예 태생부터 서로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부자와 가난한 이를 가르는 것은 외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가난한 부자도 있을 수 있고, 부유한 가난한 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이 소유한 것의 원 주인이 누구인지를 얼마나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마음이 가난한 부자가 누군가에게 절실한 필요를 발견하면 그는 주저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것으로 그 사람을 돕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소유한 부가 결국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께서 그 가난한 이를 돕기를 간절히 바라신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재물은 하느님의 뜻대로 쓰여져야 하는 것이지요.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 그대들의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그 녹이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야고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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