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를 다닐 때에 참으로 인상깊었던 것은 바로 ‘삼위일체’에 관한 교리였습니다. 강의록은 굵기가 어마어마한데 결론은 ‘삼위일체는 신비의 영역이라 알 수 없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앙적 형식은 존재합니다. 즉 본체로서는 한 하느님이요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 있다는 것이었지요. 다만 그 강의록은 거의 전체가 ‘이런 주장은 삼위일체가 아니다’라는 호교론으로 가득했었습니다.
그럼 삼위일체는 알 수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삼위일체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사랑’할 때에 그러합니다. 삼위일체는 ‘사랑’을 벗어나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철학적이고 수사학적인 어구를 늘어놓는다고 해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삼위일체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오직 사랑할 때에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식이 아파서 날밤을 새우는 어머니를 대상으로 한 논문을 발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심리 행동 분석과 통계적인 자료를 제출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논문 작성자는 어머니의 마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셈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문자’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 자신의 자식을 위해서 날밤을 새어볼 때에 비로소 그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지요.
삼위일체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하느님의 사랑에 다가설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발적인 사랑은 빨대와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의지적인 그 사랑의 빨대로 하느님이라는 거대한 바다의 물을 끌어당기는 셈이지요. 사실 우리가 우리의 하찮은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련한 의지는 하느님의 거대한 사랑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오는 것을 ‘허락’할 뿐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고 보살피고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상대가 하는 일을 이해하고 그 일을 도우려고 하지요. 삼위일체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스며들면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깃들지 않은 사랑은 반드시 어느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저 역시도 짧은 글이지만 형식적으로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서술’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에게 전달하는 마음은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 글을 쓸 이유도 없을 테니까요. 모든 거룩한 움직임은 삼위일체의 사랑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저에게 사랑을 허락하시지 않았더라면 저 역시도 사제는 커녕 그 아무것도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랑의 근본은 바로 하느님에게서, 즉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으로 하나됨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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