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이라는 것은 지독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하느님을 의심합니다. 그분에게 우리의 삶을 맡겨도 되는지를 의심하지요. 그래서 그 의심을 바탕으로 우리는 아주 일부분만 내어 바칩니다. 온전히 헌신하지를 못하는 것이지요. 언제나 우리가 주도권을 쥐고 있으려고 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면서 말이지요. 의심이라는 것 이면에는 교만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분별이 하느님의 분별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신중한 것은 좋은 것이지만 과연 누구를 대상으로 그 신중함을 펼치는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하는 데에는 주저함이 없어야 합니다. 물론 세상은 저마다의 욕구를 내세우며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우겨대곤 하지요. 진정으로 선한 일은 하느님에게 나아가는 일입니다. 설령 거지에게 돈을 주어도 그것이 나의 교만에서 비롯한 것이라면 선행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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