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에는 모터가 필요하고 동물에게는 심장이 필요합니다. 구동의 핵심이 되는 존재이지요. 이처럼 사람에게는 ‘영’이라는 것이 있어 모든 것을 가장 근본에서 조종하는 역할을 합니다.
어떤 영을 지니고 있는가에 따라서 사람은 선하게도 되고 악하게도 되며 그에 따라서 자신의 온 존재를 이끌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 영을 지닌 사람은 선한 말과 행위를 하게 되고, 악한 영을 지닌 사람은 악한 말과 행위를 하게 됩니다. 지극히 간단한 논리이지요.
헌데 인간의 영이라는 것에는 마지막까지 ‘자유’라는 것이 남아 있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선한 영이라도 스스로의 결정으로 악하게 변질될 수 있고, 또 반대로 악한 영은 선하게 될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물론 인간이 하나의 방향을 선택하고 내달리기 시작하면 변화에 이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을 심판하지 말고 언제나 ‘가능성’의 상태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을 거룩한 영이라 칭하고 ‘성령’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도 이 영을 지니고 살아가셨지요. 하느님과 예수님은 같은 영을 지니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을 우리에게 보내십니다.
영은 같은 성질의 것이라서 우리의 영은 원한다면 언제라도 성령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아들이면 우리의 일체의 행위는 거룩한 것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성령이 하는 역할은 우리를 하느님에게 이끄는 것이고 하느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도와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은 지극히 간단합니다. 하느님에게 마음을 열면 됩니다. 마치 창문을 열면 바람이 들어오듯이 마음을 열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에 마음을 열고 그것을 받아들여 실천하면 됩니다. 그래서 이 간단한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고질적인 ‘이기성’이 있어서 나 이외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돈을 벌고 싶고, 내가 잘나 보이고 싶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하느님에게 마음을 열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원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과 상충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가운데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가 잘 되기를 바라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이기성과 서로 부딪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에로 마음을 쉽게 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생생히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용서’라는 주제에 있어서 우리는 힘들어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해코지를 한 사람을 쉽게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나가 떨어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랑 할 만한 사람은 모두 사랑 하겠는데,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 만큼은 사랑하지 못하겠노라고 나서는 것이지요. 그것이 우리를 닫힌 존재로 만들어 버리고 성령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22-23)
참고로 이 구절에서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은 그 상대에게 남는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남아 있게 된다는 의미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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