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로 오른다는 이 말은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물론 공간적인 하늘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지상을 떠나 하늘로 오르면 그곳에는 텅빈 우주공간 밖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써야 하셨기 때문에 ‘하늘’로 오르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일단은 제자들에게서 떠난다는 개념을 남겨 주셨고, 또한 동시에 우리와 함께 머무른다는 개념을 남겨 주셨지요. 이것이 승천의 핵심입니다.
교황님의 방문 소식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얼마나 많은 이들이 교황님을 만나고 싶어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 외적인 모습에 현혹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황님이 실제로 전하려는 메세지라던가 그분의 가르침보다는 교황님의 외적 인기에 편승해서 그것을 어떻게든 얻어 보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마다 셀카를 찍고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지만 정작 자신의 삶을 교황님의 가르침에 비추어서 반성하는 모습은 굉장히 드물지요.
이는 예수님이 승천하셔야 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원하신다면 지상에서 얼마든지 계속 삶을 유지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신 까닭은 당신에게로 집중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차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딘가에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사람들이 너도나도 그곳을 방문하고 그분의 옷자락이라도 만져 보려고 난리를 피울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성장하기보다는 여전히 의존적인 모습을 많이 보일 것이고 또 피상적인 신앙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승천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라지신’ 것이 아닙니다. 하늘로 오르신 것이지요. 즉, 보다 높은 자리에서 우리 모두를 바라보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일은 일어나고 있지요. 예수님은 그분을 찾는 누구에게나 다가와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승천의 두번째 목적이었지요.
예수님은 단순히 사라지신 것이 아닙니다. 보다 높은 차원으로 오르신 것이지요. 우리는 이를 당장에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한계가 있는 이들이니까요. 우리에게 예수님의 승천은 기껏해야 ‘하늘로 오름’으로 느껴질 뿐입니다. 그분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보다 낮은 차원의 존재를 살펴본다면 그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예를 들어 개미들에게 우리 인간은 자신들의 차원을 넘어선 존재가 됩니다. 개미들에게는 도달할 수 없는 거리를 우리는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자유롭게 이동을 하지요. 우리는 개미들의 한계를 넘어서서 얼마든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승천하신 예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을 이루고 계십니다. 모든 미사의 성체 안에 현존하시면서 당신의 몸을 직접 나누어 주시고, 또한 당신 이름으로 모인 자리에 언제나 함께 머무르시지요. 이는 세상에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이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늘만 멍하니 바라볼 것이 아니라 승천하신 예수님의 뜻을 따라서 예수님을 품고 세상에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주님과 함께 머무르면서 용기를 잃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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