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가 온다. (요한 16, 25)
비유라는 것은 그것을 직접 체험해 보지 못한 이에게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수단이며, 또한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한 이에게 보다 낮은 수준으로 쉽고 간결하게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천상의 사정은 우리가 쉽게 체험해 볼 수 없는 것들이라서 우리는 비유로만 그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게 마련입니다. 모르던 것을 배워 알게 되고 또 그것을 체험하게 되면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나가지요. 천상에 관한 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에는 오로지 눈에 드러나는 투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가 ‘기도’의 효력을 깨닫고 나서는 기도를 하게 되고, 전에는 먹고 마시는 일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이가 ‘영혼’의 사정을 추스리려고 노력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그는 보다 참되고 소중한 것에로 자신을 확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때가 차고 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아버지를 직접 알려주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우리도 그 어떤 비유의 도움 없이도 아버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 때는 ‘역사의 시간’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2015년 까지는 비유를 쓰고 2016년 부터는 직접 알려주는 개념이 아닙니다. 때가 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가 참의 시간은 각자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아주 어린 아이라도 마음을 활짝 열면 그 시기를 일찍 채울 수 있고 반대로 아무리 어른이라도 세상의 찌든 때에 파묻혀 허송세월을 하면 죽기 직전까지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만이 우리의 깨달음을 가로막는 장벽입니다. 쥐뿔도 없으면서 스스로 모든 것을 안다고 자부하는 그 교만이 정작 우리가 깨닫는 것을 방해하게 됩니다. 신학 박사를 딴다고 그것을 아는 게 아닙니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것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지적 교만으로 사랑을 거부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인공이 되어야 하고 자신들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인물들입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를 가로막습니다. 반대로 사랑하는 이는 아버지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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