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마태 15,27)
여인은 절박합니다. 딸이 마귀에 들렸는데 아무리 손을 써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유명하다는 의사는 다 만나 보았지만 결국 알아낸 것은 그들은 이런 일에는 무능하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절박함은 방법을 찾게 마련입니다. 자식의 괴로움을 앞에 둔 어머니의 절박함은 방법을 찾습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 앞에 나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소리를 지르고 갈구합니다. 주의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외로 다정다감하지 않고 오히려 정반대의 면모를 보입니다. 한마디 말로 거절한다는 의사를 내비칩니다. 자녀들의 음식을 강아지들에게 주지 않는다, 즉 너 같은 암캐에게는 줄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여인은 어찌보면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경멸을 당한 셈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굴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예수님의 발언을 고스란히 받아 들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그 시련을 딛고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렇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바친 셈입니다. 위신, 명예, 자존심 모두를 내어 바쳤습니다. 오직 믿음에만 매달린 것이지요.
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너무나도 쉽게 ‘신앙’을 내던지는지 모릅니다. 성당에서 일어난 이런 저런 사건들 때문에 쉰다는 교우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좋을 때에는 성당에 살 것 처럼 하다가 누군가와의 충돌 때문에 더는 성당을 못 나가겠다고 공공연하게 자신의 신앙을 거부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리고는 그 핑계는 전부 성당 안의 ‘누군가’에게 덮어 씌웁니다.
아닙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부족했던 것이지요. 우리가 진정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고, 그 시련들을 통해서도 그분을 찾을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도대체 미사를 내던지고 어디에서 그 미사보다 더 큰 은총을 얻겠다는 것입니까? 절대로 그럴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저 그만큼 우리들이 교만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방 여인’이라는 말마디를 들으면서 이 여인을 낮추어 보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누구보다도 훌륭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톨릭 신자보다 더 훌륭한 믿음을 지닌 개신교 신자, 이슬람 신자가 있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은 외적 형태의 신앙에 갇혀 진실한 내면을 올바로 추스리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방 여인의 믿음을 배울 때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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