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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는 하느님



이제 너희는 보아라! 나, 바로 내가 그다. 나 말고는 하느님이 없다. 나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나는 치기도 하고 고쳐 주기도 한다. 내 손에서 빠져나갈 자 하나도 없다. (신명 32,39)

왜 하느님은 이토록 나약해 보이는 걸까요? 어째서 하느님은 전혀 활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요? 위의 성경 구절처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면 왜 악인을 내버려두시고 선인의 고통에 둔감한 것처럼 보이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의 한계에서 비롯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오해를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지금도 그렇게 활동하고 계십니다. 죽을 운명을 선택한 자는 죽게 하시고 살 가치가 있는 이는 선별해서 살리시지요. 그러나 이 표현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최대한 노력을 하시지요.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 가운데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하지요. ‘나는 일단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겠다.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망쳐 놓겠다. 그러나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시니 이런 내가 망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를 살릴 능력이 있으시겠지. 그럼 그걸로 충분하다. 오늘 나는 내 멋대로 살 것이다.’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멸망을 늦추고 또 늦추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우리가 행한 결과들이 우리에게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건강을 상하면 그 결과가 돌아오고, 심리적으로 손상된 결과도 결국 우리에게 돌아오고, 영적인 해악도 결국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당신이 정한 법을 바꾸지 못하십니다. 당신의 법은 영원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함부로 바꾸는 것은 당신 스스로를 부정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선인은 상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자비’ 또한 영원으로부터의 법칙이고, ‘심판’ 또한 영원으로부터의 법칙이지요. 하느님은 자비로우시고 공정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최대한 ‘자연스러움’을 이용하십니다. 우리 인간이 당신의 손길을 단박에 느끼지 못하게 하시지요. 왜냐하면 우리의 ‘자유’야말로 당신이 존중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유를 빼앗기고 나면 ‘종’의 상태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것이 ‘기적’이라는 것이 최소한으로 적용되는 이유이지요.

믿음은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 믿음을 가진 인간이 노력하게 하십니다. 그 산을 직접 한 움큼씩 흙을 퍼다가 다른 곳에 옮기게 하시지요. 그러다가 힘에 부칠 때에 도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산을 옮기기를 원하고 정작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방 안에 드러누워 하느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는데도 하느님이 나서서 산을 옮기지는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주한 하느님은 우리가 함부로 무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분이시지요. 우리야말로 그분 앞에서는 먼지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헌데 우리는 그 미천한 존재감으로 세상을 휘어 잡으려는 탐욕에 사로잡히기까지 하지요. 우리는 ‘겸손’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반드시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신앙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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