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들의 거룩한 자녀들은 몰래 희생 제물을 바치고, 한마음으로 하느님의 법에 동의하였습니다. 그 법은 거룩한 이들이 모든 것을 다 같이, 성공도 위험도 함께 나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벌써 조상들의 찬미가들을 불렀습니다. (지혜 18,9)
모든 것은 미리 예고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깜짝 선물처럼 다가온 것이 아니라 일찍부터 이러저러한 결과가 다가오게 될 것이라는 것이 예고되었습니다.
그들은 남들 몰래 희생 제물을 바쳤습니다. 다른 이들이 보란 듯이 엄청난 제물을 바쳐대며 자신에게 복을 기원하는 동안 거룩한 이들은 남들 몰래 참된 희생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삶이었고 겸손한 마음, 낮추인 마음이었지요.
그들은 모두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같은 하느님을 모시고 있었고, 같은 그분의 뜻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전혀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온전히 하나였고 일치되어 있었지요.
그 길의 마지막에는 위대한 성공이 있지만 그 길은 위험이 따르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이들은 그 위험마저도 알고 있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들은 약속한 곳에 이르기도 전에 감사의 찬미가를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의 신실함을 굳게 믿었고 그 약속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현실을 떠올려 봅시다.
우리는 미리 예고된 것을 전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직접적인 경제적인 위험이나 생존의 위험이 닥치기 전에는 영적인 사정들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은 자신 앞에 놓인 현세적인 일에만 신경을 쓸 뿐, 내면적이고 영원한 것은 무시하는 실정입니다. 당장 9시 뉴스에 나오는 내용에는 관심을 갖지만 영원으로부터 우리에게 약속되고 경고된 것에는 둔감합니다.
우리는 진정한 희생 제물, 남들 몰래 바치는 예물을 바칠 줄을 모릅니다. 우리가 바치는 것은 보란 듯이 드러내는 희생입니다.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은 희생, 남들이 모두 다 알아 주기를 바라는 희생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희생은 그 의미를 상실합니다. 우리는 참고 견디고 인내하기를 포기해 버린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뿔뿔이 흩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하느님의 마음을 향해서 우리의 마음을 모을 줄을 모릅니다. 도대체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진지하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다들 저마다의 이해 관계가 있고 그것을 따라서 살아가느라 서로 부딪히기 일쑤입니다.
우리는 눈 앞의 작은 위험을 보면 실망해 버리고 맙니다. 특히나 신앙에 관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불화 때문에 신앙을 저버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한 인간에게 실망해서 미사를 나오지 않는다는 이를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위험을 감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공마저도 저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좋은 것을 얻지 못하면 기뻐할 줄을 모릅니다. 약속된 것을 기다리고 희망하고 하느님의 신실함을 믿으면서 기쁨의 노래를 부를 줄을 모릅니다. 그저 불평하고 불만에 가득 차 있을 뿐이지요. 우리는 지금이라는 순간을 누릴 줄을 모르고 오직 현세 안에서 약속된 것을 얻을 순간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게 되면 또다시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할 뿐이지요. 그것이 세상이 우리에게 세뇌시킨 ‘성공’이라는 것입니다. 전혀 실체가 없고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무엇이지요. 우리는 영원을 지금부터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