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마태 23,15)
우리는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일까요? 이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질문에 우리는 때로 올바로 대답하지 못하곤 합니다.
주일 미사를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교무금을 내고 판공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보다 본질적인 질문에 올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믿는다고 하지만 도대체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본연의 방향을 상실할 때에 우리에게는 부차적인 일만 남게 됩니다. 우리가 지니지 못한 것을 내어줄 순 없으니 역시 올바른 것을 전하지도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세례의 행위를 베풀 수는 있지만 그를 참된 신앙의 길로는 이끌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가만 두었더라면 차라리 조용히 살아갈 사람들에게 오히려 더 괴로운 족쇄를 채우는 꼴이 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경우를 두고 직설적인 표현을 쏟아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표현이 좀 심한 것 같기는 합니다. ‘지옥의 자식’이라니요.
지옥은 어디일까요? 어둠이 지배하는 곳이고 사탄이 우두머리인 곳입니다. 지옥은 일종의 감옥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원하는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없는 곳이지요. 지옥의 자식은 족쇄를 찬 이들을 말합니다. 단순히 외적인 의미가 아니라 내적이고 은밀한 의미이지요. 지옥의 자식은 ‘죄’를 떠안고 살아가는 이들, 마음 깊은 곳에 족쇄가 채여져 있는 이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신앙을 그 본질적인 바를 알려주지 못하면 우리는 타인에게 족쇄를 채우게 됩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여전히 율법이라는 족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의 일을 새로 신앙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할 수 있습니다. 미사에 몇 분에 도착하는 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도착하는 것이 중요하며, 성사를 일 년에 몇 번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뉘우침을 바탕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속알맹이를 다 빼먹고 오직 외적인 형태를 완수하는 데에만 치중하기 일쑤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다른 이에게 우리도 수행하지 못하는 짐을 지우는 꼴이 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마태 23,13)
신앙의 본질은 참된 자유로 사람을 이끄는 것입니다. 물론 그 참된 자유라는 것은 고삐 풀린 자유인 ’방종’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선하고 절제된 자유입니다. 사람은 신앙에 진정으로 파고들게 되면 참된 기쁨을 누려야 하고 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 사명을 소홀히 하는 이들은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물하는 것이 아니라 족쇄를 선물하게 됩니다. 물론 그들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한 사람의 자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각자는 스스로의 구원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을 지닌 이의 영향력으로 누군가가 말 그대로 ‘지옥의 자식’이 되어 버린다면 그를 구원으로 이끌었어야 할 그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때로 신앙을 너무나 가벼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신앙은 진실한 선택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원을 향한 선택이고 한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진중한 선택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한 사람이 그 신앙의 선택을 하도록 우리 신앙인들은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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