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마태 16,28)
이 표현을 들으면 우리는 당장 눈 앞에 그려지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인 가운데 한 구석이 밝아오기 시작하고 번개처럼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모습을 연상해 볼 수 있지요.
하지만 ‘본다’는 것을 단순히 시각 정보에만 국한시키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는 훨씬 더 넓은 영역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단순히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외에도 여러가지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상태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그의 외면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와 만나서 조금만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그의 영혼이 어떠한 상태에 처해 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선호하는 내용의 대화가 무엇이며 자기 스스로에 대한 일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고 이런 저런 문제에 대처하는 자세는 무엇이며 무엇보다도 그 근본에 신앙이 깔려 있는지에 대한 것들을 통해 그의 영혼 상태를 바라볼 수 있지요.
우리에게 이런 눈이 길러지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 밖의 것들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열매들이 어떻게 익어가고 있으며 때가 도래하는 것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 마저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사람의 아들은 이미 당신의 나라에 다가오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나라를 우리는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지요. 수많은 사람들은 이 지상의 유토피아를 찾아서 투쟁하고 싸웁니다. 그러나 이 땅에는 영원히 이어질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나라는 영원의 나라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존재하지만 지상의 어디에서도 발견하거나 확인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주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이며 주님의 통치는 이미 주님께 마음을 봉헌한 이들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이 두 나라는 완전히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한 곳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완전히 다른 영역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악한 통치자가 있어도 하느님의 나라의 자녀의 선함을 생생하게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악이 더 활발히 움직이는 가운데 선함은 그 빛을 더 드러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모쪼록 여러분들이 그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즉, 여러분의 죽음 이전에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오는 것을 보게 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통치가 여러분의 마음 속에 생생히 살아 숨쉬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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