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마르 6,19)
세례자 요한과 같이 올바른 뜻을 내면에 품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헤로디아 처럼 앙심을 내면에 품고 그것을 반드시 실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마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이 뿜어져 나오게 마련입니다. 선한 의지는 선한 열매를 맺고 악한 의지는 악한 열매를 맺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저마다 그 열매를 따먹게 됩니다.
악인들이 악을 선택하는 이유는 선보다 악이 좋기 때문입니다. 선은 지루하고 인내가 필요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악인들은 쉽고 편하고 자신에게(만) 득이 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지요. 술을 진탕 마시는 사람도 그렇고 남의 험담을 하는 사람도 그렇고,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증오하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선의와 악의를 내면에 품고 있는 동안 온갖 기회들이 지나갑니다. 선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기회와 악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기회가 지나가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저마다 그 기회를 잡아서 선과 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선의를 지니고 있는 것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구체적인 선을 실천해야 하지요.
우리가 그런 기회들을 붙들고 앞으로 나아갈 때에 우리에게는 더 많은 기회들이 다가오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에 더욱더 훈련된 사람이 되지요. 선을 자꾸 실천하는 사람은 더욱 선의 기회가 다가오게 되고 그것에 익숙해지고 단련이 됩니다. 반대로 악을 자꾸 실천하는 사람은 더욱 많은 악에 노출되게 되고 그것에 익숙해지고 더 극심한 악을 저지르게 되지요.
헤로디아는 증오를 품은 이의 상징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포착해서 결국 뜻을 이루고 맙니다. 반대로 세례자 요한은 선을 가득 품은 이의 상징과 같은 존재입니다.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선을 실천했고 마침내 순교의 기회를 얻게 되지요. 물론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세례자 요한은 그저 하나의 바보처럼 보일 뿐입니다. 반대로 헤로디아와 같은 이들은 ‘영리’하다고 추켜 세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 가장 낮고 약한 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선의 기회를 무던히 실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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