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탕감에 대한 인식
먼저 빚진 종은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올바로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자신이 그리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오히려 전능하신 분 앞에 많은 빚을 지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셨다는 인식을 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2. 자신에게 빚진 종에 대한 만행
하지만 이 종은 자신에게 빚진 종, 그것도 오직 일부만을 빚진 종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판단 기준을 내세웁니다. 자기 자신이 받은 자비와 은혜와는 다르게 본인은 정작 빚을 진 동료에게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는 철저하게 빚을 갚기를 강요하고 그것이 이루어 질 때까지 동료를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3. 분노한 주인
이에 주인은 다시 그를 불러 그가 한 그대로 그에게 돌려주게 됩니다. 즉 진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감옥에 가두는 것이지요.
이 일련의 과정을 우리는 ‘합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1번에서 하느님은 이미 모든 것을 눈감아 주신 셈이니까요. 이 일련의 과정은 합당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가 넘쳐나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종은 자신이 받은 것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그저 자신에게 빚진 이에게 열중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고 있을까요? 사실 이 불의한 종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1번에 대한 인식이 불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무엇이며 과연 무슨 잘못을 얼마나 한 것인지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변의 이웃들, 동료들을 바라보면서 철저한 기준을 적용 시킵니다. 행여라도 누군가가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죄를 짓기라도 하면 우리는 더욱 철저한 심판의 기준을 마련해서 그를 세상에서 없애 버리려고까지 하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적용한 그대로 우리 자신에게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철두철미함을 요구한다면 그 기준 그대로 우리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너그럽고, 자비롭고, 관용적이라면 그 또한 우리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무조건 상대가 나쁜 짓을 드러내어 놓고 하는데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말을 그가 어떤 추악한 잘못을 저질러도 눈감아 주라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사랑한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그가 올바른 길을 걷도록 돕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가 진정으로 뉘우칠 때에 우리는 그가 한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론상으로는 복잡해 보이지만 구체적인 실천에서는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복잡한 것은 오히려 우리의 마음이지요. 우리는 무엇이 하느님께서 원하는 것인지 무엇이 우리가 원하는 것인지 분별하기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느님이 원하는 것이라고 우겨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서로를 위해서 진심으로 충고해 줄 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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