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를 하는 것과 악행을 눈감아 주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처음 것은 적극적인 사랑이고 뒤의 것은 무책임함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게 되면 애가 쓰이는 것이 보통입니다. 용서를 하는 데에는 애가 쓰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용서라는 것은 나의 자존심을 억누르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그분의 뜻에 따라 상대를 용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악행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것이 귀찮고 싫어서 그저 그가 하는 짓을 못 본 척 하는 것은 전혀 용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무책임함이고 영적 게으름에 불과합니다. 이 두 가지는 전혀 상반되는 두 가지 방향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후자, 즉 악행을 눈감아 주는 사람은 전혀 용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 악행이 타인을 향한 것일 때에는 눈감아 줄 수 있지만 그 악행이 자신에게 방향지워진 것이라면 그는 분명 불같이 화를 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줄 알아야 합니다. 상대가 무슨 짓을 하건 괜찮다고 하는 것은 전혀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올바른 일을 할 때, 그가 선의를 지녔지만 약해서 넘어진 상태에 있을 때에는 그를 응원해주고 괜찮다 해야 하지만, 그가 악의를 지니고 나쁜 짓을 하고 있는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훗날 나에게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용서를 하는 것과 악행을 눈감아 주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처음 것은 적극적인 사랑이고 뒤의 것은 무책임함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게 되면 애가 쓰이는 것이 보통입니다. 용서를 하는 데에는 애가 쓰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용서라는 것은 나의 자존심을 억누르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그분의 뜻에 따라 상대를 용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악행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것이 귀찮고 싫어서 그저 그가 하는 짓을 못 본 척 하는 것은 전혀 용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무책임함이고 영적 게으름에 불과합니다. 이 두 가지는 전혀 상반되는 두 가지 방향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후자, 즉 악행을 눈감아 주는 사람은 전혀 용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 악행이 타인을 향한 것일 때에는 눈감아 줄 수 있지만 그 악행이 자신에게 방향지워진 것이라면 그는 분명 불같이 화를 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줄 알아야 합니다. 상대가 무슨 짓을 하건 괜찮다고 하는 것은 전혀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올바른 일을 할 때, 그가 선의를 지녔지만 약해서 넘어진 상태에 있을 때에는 그를 응원해주고 괜찮다 해야 하지만, 그가 악의를 지니고 나쁜 짓을 하고 있는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훗날 나에게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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