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마태 23,23)
그들은 왜 십일조를 중요시 여길까요? 보다 중요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저버리면서까지 그렇게 하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의 행복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렇게 해야 기쁨과 행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내적인 가치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셈입니다. 의로움을 추구하기 보다는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불법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채우려고 하고, 자비를 소중히 여기기 보다는 사사건건 따지고 들고 증오하기를 즐기기 때문이며 신의를 지키기보다는 서로의 필요에 따라 말을 바꾸고 약속을 어기기를 밥먹듯이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국 자신의 ‘이기성’ 속에서 기쁨과 행복을 찾는 이들이지요. 그들은 하느님과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이들인 셈입니다.
그렇게 그들이 이기적인 모습으로 살아갈 때에 그들에게 가장 소중해지는 것은 바로 ‘돈’이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돈’을 가장 소중히 여기기 시작합니다. 돈이라는 것에서 바로 자신들의 편의와 안락, 즉 자신의 행복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행하다고 하지만 사실 그들은 스스로 행복함을 찾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전혀 다른 행복관을 지니고 있는 셈이지요. 그들은 모으고 쌓고 착취해야 행복하고, 예수님은 나누고 누리고 베풀어야 행복한 셈입니다. 아마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주변에서 그렇게 하는 사람을 보면 ‘어리석다’고 하겠지요.
과연 누가 어리석은 사람일까요? 과연 누가 행복한 사람일까요? 사람들은 이미 자신들이 갈 방향을 정했고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다만 이 말은 해 두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하느님이야말로 가장 완전하신 분이고 영원 속에서 분별을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그 외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불행하다고 하는 이들은 정말 불행한 이들이 맞다고 확신합니다. 따라서 저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처럼 살아가지 않을 것이고 반대로 예수님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을 뒤따라 살아가고자 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