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오너라. 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를 너에게 보여 주겠다.” (묵시 21,9)
어린양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수단입니다. 어린양은 과거 이스라엘의 제사에서 희생 제물로 쓰였고, 따라서 구약의 탈출 사건에서 그 피로 이스라엘의 죽음을 대신한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죄를 씻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한 상징으로 어린양이 사용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지요.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미사는 여러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그 중 하나로 바로 구약의 제사를 피흘림 없이 반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거룩한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바로 우리의 죄를 씻는 소중한 제사인 셈이지요.
헌데 이 어린양에게는 ‘신부(新婦)’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묵시록은 그 신부가 바로 거룩한 도성 천상 예루살렘이라는 것을 서술하지요.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에게는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 있는 곳이었고 하느님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입니다. 따라서 천상 예루살렘은 마찬가지로 거룩한 이들이 모이게 되는 곳, 즉 천상 교회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 교회는 천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묵시록은 마지막 때를 서술하면서 천상 예루살렘을 드러내지만 그 천상의 예루살렘은 이미 지상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바로 지상의 교회는 천상 예루살렘의 예표인 셈이지요. 하지만 지상의 교회라고 해서 착각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왜냐면 지상의 외적 구조상의 교회는 수많은 이들이 분별 없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복음의 비유와도 같습니다. 원래 초대받은 이들이 초대를 거절하자 임금은 길거리에 나가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끌어모은 것과 비슷한 셈이지요. 지금의 교회 안에는 온갖 종류의 물고기들이 다 있습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두루 섞여 있지요. 밀과 가라지가 섞여 있는 것입니다. 혼인 예복을 입은 사람과 입지 않은 사람이 두루두루 섞여 있습니다.
지상의 교회는 천상 교회의 예표이지만 진행 중인 교회이며 미완성의 교회이고 순례하는 교회입니다. 하지만 그 교회가 어린 양의 신부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어린양’이 되기 위해서, 즉 당신이 피를 흘려 마땅히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할 이들을 살려내기 위함이기에 그분은 지상의 교회를 천상의 교회로 들어높이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선한 이들을 위해서만 오신 게 아니라 죄인들, 회개하는 죄인들을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지상의 교회는 어린양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신부는 자신의 존재이유를 자주 망각하고 여전히 반항하고 거역하는 신부인 셈이지요.
그러나 그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영광에 의해서 장식됩니다. 예루살렘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그 외적 건축 형태나 양식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교회라고 내세울 때에 집중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지요. 우리 성당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양식이 로마네스크 양식이거나 바로크 양식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방식은 바뀔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도성은 초석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물론 으뜸은 예수님이시지만 그분의 뒤를 이어 그분의 말씀을 전한 이들이 존재합니다. 하느님의 성전을 이루는 초석은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이고 예언자들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벽돌로 쌓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드는 이들의 선한 의지로 쌓여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양의 신부이자 천상 예루살렘의 예표인 교회입니다. 우리의 교회는 예수님의 거룩한 신부입니다. 다만 천상에서 그 혼인이 완결되기까지 지상에서 신음하는 순례자인 교회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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