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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종


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마태 24,45-47)

오늘 복음은 다른 이들을 돌볼 직분을 맡은 이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그런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에게 아주 유용한 가르침이 되겠지요. 통상적으로는 사제단이 될 것이지만 평신도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수도자들도 마찬가지이고 공동체의 장을 맡고 있는 평신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인은 오직 한 분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우리 모두는 주인에게 속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다만 종들 사이에 직분이 나누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어느 종은 마당을 쓸고, 어느 종은 부엌일을 하고, 그리고 어느 종은 그런 종들을 돌보고 먹이는 일을 맡은 것 뿐이지요.

우리는 모두 같은 종입니다. 주인의 입장에서는 모두가 필요하고 소중한 존재들이지요. 헌데 이런 종들 가운데에서 스스로를 뛰어난 존재로 생각하고 심지어는 스스로를 주인의 위치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들이 다른 종들을 잘 돌보기라도 하면 좋겠지만 스스로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다른 이들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려고 합니다. 왜냐면 그들은 주인의 존재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뜻을 상실한 그들은 저마다의 뜻이 가장 으뜸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뜻, 즉 ‘이기심’에 따라서 모든 일을 처리합니다. 그들이 더 높은 자리에 오르면 오를수록 그들의 오만, 즉 갑질은 더욱 더 극심해집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들을 한참 뛰어넘어 계신 분이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 사실만 올바로 되새길 수 있어도 크게 엇나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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