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히브 12,3-4)
예수님이 맞서 싸운 것은 단순한 한 사회 계급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참으로 잘못 인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었고 하느님의 모든 진리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맞서 싸운 것은 보다 더 큰 규모의 것이었지요.
그러나 그것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내면에 깊이 숨겨져 있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우리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죄’라는 것이지요. 죄라는 것은 하느님에게 맞서려는 마음,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길을 걸으려는 내면의 의지적 작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죄’를 외적인 행위로 분별합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추문을 일으킨 이들에게 우리는 곧잘 심판의 눈길을 던지지요. 하지만 정작 본인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죄의 흐름을 보기는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적잖은 애가 쓰이는 일이고 힘든 일이며 수치스런 일이니까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보기를 외면하고 주변에 책임을 전가하는 일을 쉽게 합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의 내면의 그 부분을 건드리는 이를 만나게 되면 못견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만큼 예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아주 사소한 충돌도 견뎌내지 못할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으로써 쌍날칼과도 같이 사람들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가 그 안에 숨겨진 것을 드러내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도 세상 그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그 일을 해내셨지요.
그래서 그 일의 결과는 죄인들의 분노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던 쾌락과 부와 권력과 명예와 위선을 즐기고 싶어했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모조리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분노하게 되었습니다. 제 몫을 잃는다는 생각에, 제 ‘정당한’ 몫을 잃는다는 생각에 화를 내기 시작했고 그 반작용으로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고 가기 시작했지요.
그것이 예수님 당시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똑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오늘날의 현실 안에서 전혀 다른 외투를 입고 일어나고 있을 뿐이지요. 그러나 그 내적인 움직임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솔직히 바라보기 힘들어합니다. 자신 안에 숨겨져 있는 어두움을 감추려고 하지요. 하지만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이는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자신의 어두움을 감싸 안고 예수님을 피하던가, 아니면 그 어둠을 솔직히 내어놓고, 수치와 인내와 시련을 감수하면서 예수님을 따라가던가 하는 선택이지요.
주변이 조용하다고 아무런 일이 없다고 착각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가기보다는 세상에 머물러 있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더 편한 방식이기 때문이지요. 용서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기보다는 그냥 그를 미워하도록 자신을 방치하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왜냐면 그것이 더 쉽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히브리서에서 이런 현실에 처한 우리들에게 용기를 주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처절한 수난을 떠올리면서 우리에게 닥친 고난이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알려주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잊어가기 시작했고 그분의 삶을 중요시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사도들의 권고, 즉 예수님의 삶을 바탕으로 하는 권고도 그 강도가 희석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예수님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그분의 삶을 되새기고 그 가치를 되새겨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을 우리 삶 안으로 다시 받아들이고 우리의 삶을 바꾸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루카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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