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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과 깨어남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하지만 그 행복을 어디에서 찾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변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들을 취하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텔레비전과 술이 있고, 담배,, 외모 가꾸기, 쇼핑하기, 인기를 얻기, 권력 지니기 등등이 뒤따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정한 이러한 기준들에 도달함으로써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기지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러한 것들에 파묻혀 살면서도 그닥 행복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두 가지 방향성이 나뉘게 됩니다. 더욱 더 그러한 것을 파고드는 ‘중독’의 상태와 본연의 행복을 찾아 나서는 ‘깨어남’의 상태로 나뉘는 것입니다.

중독의 결과는 심각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에 중독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의미없이 그 행동을 반복할 뿐입니다. 시간이 조금이라도 나면 그 고독을 견디지 못해 텔레비전을 틀고 멍하니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술에 의존하는 사람도 생겨납니다. 외모를 가꾸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데에 중독되어 가는 이들도 있지요. 그리고 중독 상태에서 사람은 갈수록 내적으로 피폐해져 갈 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 그 중독을 견뎌내지 못하는 시기가 다가옵니다. 텔레비전의 재미난 채널을 찾다가 찾다가 결국 무료함에 스스로 무너지는 시기가 다가오게 되고, 미모를 아무리 가꾸어도 시간이 갈수록 진행되는 노화를 이겨내지 못하며, 술은 결국 건강을 해치고 말지요. 자신의 의지가 아닌 상태에서 중독을 멈추어야 할 때에 인간은 ‘금단증상’을 겪게 됩니다. 이 역시 만만치 않은 시련이지요. 이것을 이겨낸다면 다행이지만 이겨내지 못한다면 사람은 완전히 망가지게 됩니다.

깨어나기 시작하는 이들은 행복의 본질을 찾아 나섭니다. 자신의 내면을 채워줄 수 있는 참된 것이 무엇인지를 찾기 시작하지요. 하지만 이 역시 만만한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속이는 자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지요. 세상 안에는 자신을 스승이요 인도자로 내세우는 자들이 널리고 널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자들을 따라가기 시작합니다. 어느 심리학 박사의 말을 듣고, 사주를 보고 점을 치고 타로 카드를 보고, 그 밖에도 무수한 요소들이 스스로를 스승으로 내세우면서 그렇게만 하면 된다고, 메뉴얼만 따라가면 행복해 질 수 있다고 하지요.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해도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심각한 경우에는 스스로 전혀 행복하지 않은데 마치 행복한 것처럼 최면을 걸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일종의 중독인 셈이지요. 외적인 것이 아닌 내적인 의존 상태, 바로 중독인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의 본질은 인간 본연의 상태에서 비롯합니다. 인간은 가장 자연스러울 때에 가장 행복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 자연스러움은 하느님을 배제하고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은 바로 하느님에게서 비롯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인정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원죄라는 것은 바로 이 하느님의 부정, 그분의 보살핌에서 벗어나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려는 의지였지요. 이는 DNA 속에 들어 있어서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각 인간이 탄생 이후 세상을 인식하고 철이 들어가면서 가장 우선적으로 빠지게 되는 상태, 곧 ‘이기성’인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진실로 뉘우치고 하느님에게 돌아와 세례를 받을 때, 혹은 그 부모가 그 일을 대신해서 수행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어린 아이에게 세례를 줄 때에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원죄를 없애는 효과를 지닌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세상은 여전히 악으로 이끄는 수많은 유혹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인간은 비록 원죄에서 해방 되어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다시 유혹에 빠져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짓게 됩니다. 그것을 본죄라고 합니다. 그리고 진실한 뉘우침과 고해성사를 통해서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지요.

인간의 의지가 순수해 지는 날, 즉 인간이 하느님의 뜻 말고는 다른 것을 바라지도 찾지도 않는 날 그는 천국의 시민이 됩니다. 하지만 천국의 시민이 된다는 것이 세상 안에서 아주 평온하게 누리고 쉬면서 살아가는 것이라 착각하면 안됩니다. 그는 깨어나기 전의 수배의 열심으로 일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 온갖 중독과 유혹에 빠져 어둠에 머물러 있는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일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깨어있기 때문이고 자기 스스로 무엇을 하고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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