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무슨 수를 쓰든 여러분은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2테살 2,3)
속이는 이에게 넘어가는 이유는 속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겠지만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진리를 찾기보다는 ‘나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욕구를 추구하다보면 그 욕구를 자극시키는 거짓 가르침을 만나게 되고 결국 거기에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목이 마른 사람이 물을 찾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냥 물이 맛이 없다고 단물을 찾기 시작하면 그는 사실 목이 마르기보다는 ‘맛있는’ 것을 찾는 욕구를 표현하는 것이지요.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목이 마른 사람은 물을 주면 감사히 마실 것입니다. 하지만 맛깔스러운 물을 찾는 이가 있으니 그런 이들은 수사학적이고 현학적인 말에 쉽게 넘어가는 것이지요. 그것이 물인가 아닌가보다 그것이 맛이 있는가 아닌가를 따지는 셈이지요.
모든 고해성사는 동일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고해성사의 사제가 어떤 사람인가, 그가 어떤 보속을 주는가 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지요. 밥을 먹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배가 고픈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배가 부른 상태에서, 먹을 욕구가 없는 상태에서 음식을 고르면 그 음식의 맛을 두고 따지기 시작하게 됩니다.
고해성사도 마찬가지이니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속죄하고 죄를 뉘우치며 하느님의 용서를 갈구하는가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바로 그 욕구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고해 신부를 고르고 고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나라가 예전으로 돌아가서 말도 못하는 이방인 신부가 겨우 일년에 한 번, 혹은 5년에 한 번 고을을 방문 할까 말까 한다면 여러분은 과연 그 고해신부가 한국어도 제대로 못한다고 투덜댈 수 있을까요? (이는 여전히 남미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본질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음식에 독을 집어넣어 놓고 온갖 화학 조미료로 그 맛을 맛깔스럽게 꾸며 놓는다면 우리는 그러한 엉뚱한 맛을 찾다가 독을 집어먹고 죽어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이비 종교들이 하는 짓입니다. 실제로는 우리의 영혼을 죽이는 것인데 우리가 추구하는 여러가지 부수적인 것들을 채워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리로 다가가서 물들어 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아이들은 사탕 맛을 들이면 음식을 거부하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에는 음식에 길들여지는 훈육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의 본질을 잊고 엉뚱한 것들,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고 우리의 학적 욕구를 채워주는 것들을 추구하다보면 엇나가기 십상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지루함이 있게 마련이고 때로는 불같은 시련을 겪기도 하는 법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피하고 피해서 나의 입맛에 맞는 것을 고르다가 옆길로 새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신앙은 때로 지루하고, 때로 무료하며, 때로는 거친 시련을 겪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회피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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