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루카 13,26-27)
하느님께서 당신의 신앙인들을 바라보시는 기준은 그가 의를 실천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의로움에 대한 기준과 사람들의 의로움에 대한 기준은 너무나 다른 것이 현실입니다.
삶이 엉망 진창인 어느 무뢰한에게 성당 다니는 사람이 무얼 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면 그는 ‘성호’를 긋는 흉내를 낼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악인도 의로운 행세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연의 의로움을 흉내낼 순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로움은 의롭게 살아야만 보여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성당을 다니면서 흔히 생각하고 있는 의로움의 기준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학 과정을 수료한다고 어느 특별 신심 프로그램을 졸업한다고 의로움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횟수와 기도 시간이 많다고 의로움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고해성사를 길게 보거나 자주 본다고 해서 의로움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위에 언급한 모든 일들은 내적인 회개 없이도 얼마든지 이루어낼 수 있는 외적인 양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라는 표현과 같은 것이지요.
우리가 실천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외적인 모습을 바라보거나 그분의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실천해야 할 것은 ‘의로움’이고 내적인 닮음입니다. 우리는 선한 외적 흉내를 낼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우리는 가식적으로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가 잘 되기를 바라며 그를 도와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을 도와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학교나 수녀원에서는 수련 기간 동안 외적인 훈련을 하지요. 하지만 그 외적 훈련이 곧 내적 변화로 직결되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본인 의지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이는 마치 악마가 우리를 유혹할 수는 있어도 결코 우리를 강제로 죄짓게 할 수는 없는 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어두운 현실 속에 머물러 있어도 하느님을 찾을 수 있고 죄를 피할 수 있게 마련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정돈되고 아름다운 환경 속에 살더라도 본인의 의지로 죄를 지을 수도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의를 실천해야 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의를 흉내내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 내면이 의로움을 즐기고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먼 훗날 아무리 그분 앞에서 우리가 당신을 향한 공동체의 외적인 껍데기를 지니고 살았노라고 우겨 보았자 하느님은 우리를 알지 못한다고 하실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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