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움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의로움은 오직 하느님과 그 사람만의 몫입니다. 다만 의로움은 ‘열매’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 열매 또한 감추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하게 된다’는 것이 과연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 것일까요? 진정으로 선한 사람은 자신이 행하는 것을 숨깁니다. 그래서 그의 선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행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그의 선은 감추어집니다.
사람들은 분별할 줄 모릅니다. 무엇이 진정한 선인지 어떠한 것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 맞추어 가려고 합니다. 사람들지 좋다 하는 것을 선으로 치부하고 사람들이 싫다 하는 것을 악으로 치부하지요.
텔레비전에서 수많은 맛깔스런 요리가 나오고 먹방을 보여주면 ‘맛있는 것’이 곧 ‘선한 것’으로 둔갑하고 맙니다. 사람들이 외모가 아름다운 연예인을 흠모하면 ‘외적 밉모’가 곧 선으로 둔갑하고 말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비록 맛있지는 않아도 함께 나누는 음식의 소중함, 음식 그 자체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고 또 내적인 아름다움을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에 진정으로 귀를 기울여야 할지 스스로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외적인 경력과 타이틀 때문에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기지요. 박사도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쉽게 망각하는 것입니다. 앞에 나와서 말하고 있는 이가 하느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걸어가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그가 ‘박사’라는 이유 때문에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지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가가야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너무나도 초라한 위치에 머무를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낡고 낡은 책에 등장하는 오래된 인물로 죽어 있을 뿐이고, 전혀 살아있는 인물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와중에 눈을 뜨고 귀를 여는 이가 있어서 보아야 할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듣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생생하게 살아 계시며 하느님의 외아들로 세상을 여전히 돌보고 계신다는 것을 굳게 믿어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어 아는 것이 실제로 눈으로 보아 아는 것보다 훨씬 정확하다는 것을 그들은 조금씩 이해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여전히 장님으로 귀머거리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보고 들을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 눈을 닫고 귀를 닫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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