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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2주일


대림2주일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골짜기(영적 진보의 1단계: 죄의 사슬에서의 해방)
낮춰진 이들입니다. 자신의 죄책에 눌려 신음하는 이들입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진정 따스한 목자로 다가와 그들의 손을 잡아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우시고, 묻은 흙을 털어 주십니다. 그리고 괜찮다 하시며 다시 가자 하십니다. 때로는 다리에 힘이 풀린 어린 양을 당신이 몸소 가슴팍에 안고 가시기도 하십니다. 세상사의 무게에 짖눌린 이들, 자신의 과오와 결함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은 주님께로 나아오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의 짐을 대신 져 주십니다. 다만 여러분은 주님이 지우시는 멍에를 메고 가십시오.

산과 언덕(영적 진보의 2단계: 헛된 거룩함에서 벗어남)
교만한 자들입니다. 적지않은 신앙인들이 속해 있는 그룹입니다. 스스로 교회 규정을 지키면서 구원에서 멀지 않다고 착각하는 이들, 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에 대한 열정이 없이 입술로만 모든 신앙생활을 하고 실제 삶 안에서는 '자신의 뜻'이 최우선인 이들. 미운 이들을 계속 미워하고, 증오하는 이들을 여전히 증오하며 자신에게는 모든 이유가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 사랑스러운 존재만 사랑하며 진정 사랑이 필요한 이웃에게는 사랑을 내어주기를 거부하는 이들. 신앙은 일종의 보험일 뿐이고, 실제로는 '돈'의 신, '물질'의 신을 더 섬기는 이들. 자기네들이 사고 싶은 건 다 사면서 길가다 만나는 거지에게 동전 하나를 주느냐 마느냐로 고민하는 위선자들. 이들은 사정없이 깍여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굽은 데(영적 진보의 3단계: 욕의 다스림)
우리의 바램은 많이 휘어져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을 향해야 하는 우리의 바램은 세상으로 인해, 물질들로 인해 많이 휘어진 상태입니다. 어떻게 점검하느냐구요? 텔레비전에서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하는 시간에 묵주기도할 자신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하느님보다 이 세상을 더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대상을 결코 놓치지 않을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바라는 마음, 욕구하는 마음은 하느님을 향해서 직선으로 뻗어있지 않고 세상의 여러 가지 것들로 인해서 많이 굽어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이런 우리의 욕구를 똑바로 펴서 하느님께로 향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거친 길(영적 진보의 4단계: 일상의 작은 소소함 속에서 하느님을 찾음)
골짜기는 메워졌고, 산과 언덕은 낮아졌고, 굽은 길은 곧아졌습니다. 이제 걷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왜 그리 잔돌들이 많은지요? 우리는 이 잔돌들 마저도 매끈히 밀어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뜻을 세우고 일상 안에서 영적으로 진보를 하더라도 언제나 매 순간 다가오는 작은 시험들은 여전합니다. 아니, 우리의 길이 더욱 평탄해지면 평탄해질수록 더욱 작은 돌이 성가시게 될 것입니다. 마치 산을 타다가 논바닥으로 들어서면 편안하게 느껴지고, 그러다가 자갈길로 들어서면 좀 더 편하고, 그러다가 흙길로 들어서면 더 낫고, 그러다가 잘 포장된 아스팔트 길, 그리고는 대리석 바닥이 깔린 길로 들어서는 일련의 과정을 연상하시면 됩니다. 우리의 영적 여정도 그렇게 흘러갑니다. 아주 지극히 작은 걸림돌이라도 치워 버려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쩝니까? 우리는 여전히 '죄'에 사로잡혀 있는 불쌍한 이들입니다. 여러분, '고해성사'를 통해서 주님의 도움을 얻으십시오. 여러분의 큰 돌들을 걸러내고, 그리고 '기도, 단식, 자선'으로 여러분의 길을 깎아 나가십시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아니, 지금부터 길을 시작해서 단숨에 여느 성인보다 더 나은 성덕을 연마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성덕은 '시간'과 '양'에 달린 게 아니라, '마음의 의지'와 그 '질'에 달린  것이니까요. 건투를 빕니다. 화려하지만 아기 예수님의 상 말고는 아무것도 오지 않는 외적인 구유보다는 여러분의 마음 속에 아기 예수님의 구유를 잘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곧 주님께서 다가 오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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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