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3주수요일
요셉은 진정 의로운 사람이었고, 하느님 안에서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하느님스런 '의로움'을 잘 드러내어 줍니다.
먼저 인간사의 의로움을 간단히 서술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악행 - 심판 - 무혐의 또는 처벌 / 선행 - 포상
한 마디로 구약의 율법 그대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방식입니다. 10개의 빵을 가진 사람에게서 1개를 훔쳤으면 법에 규정된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거나 끼친 피해를 고스란히 되갚아야 합니다. 이 시각 세상의 법정 안에서 쉴새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두고 '의롭다'고 하고 이런 일을 명확하게 잘 구별해 낼 수록 '의로움'에 더 가까이 다가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오늘 복음의 요셉의 행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최대한 완곡하게 묘사를 해서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라고 표현하지만 보다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곧 약혼할 애인이 사생아를 밴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요셉이 아니었더라면 그 누구라도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사실관계를 밝히고 당시의 풍습대로였다면 심하면 마리아를 돌로 쳐서 죽여 마땅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달랐습니다. 그의 의로움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고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 말인즉슨 그는 여전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도 못한 채로, 천사가 꿈에 나타나 알려 주기 전에 이미 마리아를 '용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마리아를 '보호'하기 위해서 '남모르게' 파혼을 하기로 작정을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의로움을 닮은 요셉의 '의로움'입니다. 요셉은 '심판'이전에 먼저 '용서'를 집어 넣습니다. 요셉의 행위를 도식화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악행 - 용서 - 죄의 결과의 처리
요셉에게는 '심판과 처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악행의 결과물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그 결과를 처리하는 것을 고심할 뿐입니다. 어느 철없는 아이가 유리잔을 깨뜨렸을 때에 세상의 엄마라면 그 아이의 죄를 고쳐주기 위해서 사정없이 패고 그 유리잔도 치우도록 매섭게 명령하겠지만, 요셉의 의로움을 아는 엄마라면 먼저 놀란 아이에게 다가가 괜찮다고 말을 해 주고, 아이가 다친 데가 없는지를 살핀 후에, 유리잔을 치우면서 앞으로는 어떻게 조심할 수 있을지를 주의깊게 알려주는 방식을 선택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의로움'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런 하느님의 의로움을 알지 못한채로 우리 이웃에게 지독히도 매서운 눈길을 돌리기 쉽상입니다. 꼬치꼬치 따지고 밝히려 드는 가운데 '용서'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고 너와 나의 마음은 너덜너덜 걸레가 되어 버리고 말지요. 참으로 어리석은 우리들,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이제 성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작디 작고 여린 아기 예수님을 모시는 우리의 마음 속에 '세상의 날카로운 의로움'이 남아있어 아기 예수님이 다치시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