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모기가 날라들어 참다 참다가 일어나 불을 켰고 모기를 찾았다.
결국 발견하지 못해서 손이 닿는 곳에 살충제를 두고는
불을 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았지만,
형광등의 빛이 느껴졌다.
이 빛은 오히려 나를 성가시고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빛 때문에 우리는 '시각'을 이용하게 되고,
또 바로 그 시각 때문에 우리가 당하는 유혹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 빛은 세상에서 사용되는 빛이다.
불을 켜기 전만해도 나는 '하느님의 빛'에 감싸여 있었던 것이다.
그분의 빛은 세상에는 어둠이 된다.
우리는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것을 '어둠'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일상은 신비 속에 가려진 채로
우리는 눈과 다른 감각 기관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현실'이라고 인지한다.
그렇지 않다.
진정한 현실은 우리의 감각을 넘어서 존재한다.
진정한 현실은 우리의 감각을 넘어서, 우리의 이성과 감정을 넘어서 보다 심층적인 곳에 있으며
우리는 그 현실을 향해 나아가기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여전히 우리의 감각의 차원에 매달려 있다시피 한다.
이것이 없으면 죽기라도 하는 듯...
물론 죽는다. 육이 죽게 된다.
하지만 그때에 비로소 영이 살기 시작한다.
수많은 성인들이 '절제'라는 것을 실천한 이유이다.
육이 전부인 세속인들에게 이는 미치광이짓으로 보였고,
곧잘 그들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마땅히 할 것도 줄이면 어쩌느냐고,
접시물에 코 박고 죽으라는거냐며
매섭게 그들을 질타했다.
하지만 그들은 저항하지 않았고,
그들의 그런 질타마저도 기쁘게 받아들여 자신의 '자존감'을 봉헌하는 데에 썼다.
나 역시 이 길을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일상 안에서의 작은 트러블에도 곧잘 감정이 크게 동요되는 걸 보면,
그리고 여전히 맛있는 음식이 그리운 걸 보면,
나 역시도 여전히 그 길을 제대로 시작하지 못한 게 분명하다.
하지만 같이 걸어가자고 제안하고 싶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16장 2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