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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Q&A


십자가

Q. 십자가의 의미가 뭘까요? 어떤 신부님은 자기로 인해서 혹은 타인으로 인해서 생긴 불행은 십자가가 아니라고 하시던데... 예를 들면 만약 제가 가진 재산이 없는 남자와 결혼을해서 일생을~ 경제적으로 힘들게 산다.. 이런건 십자가가 아니라고. 또 음.. 결혼을해서 비정상적인 애를 낳아서 일생~ 맘고생을 한다... 이런것이 십자가라고 하시던데... 보통 사람들은 자신으로 인해서 혹은 남때문에 너무 힘든 생활을해도 '그건 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지...' 이렇게들 흔히 말하잖아요. 근데 이런건 십자가라고 표현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구요. 제가 그 신부님 말씀을 제대로 몬 알아묵은겐쥐~ 물론 신부님마다, 이것뿐만 아니라 견해가 틀리시니... 십자가의 의미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일까요?

A. 십자가, 참으로 주변에서 많이 접하는 성물이고 교회 안에서 많이 듣는 단어이지만, 실제로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원래의 십자가의 의미부터 간단히 짚어보면 '가장 고통스러운 형틀'이라고 할 수 있지요. 고통의 최상급의 표현이자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는 이 의미부터 제대로 이해를 해야 하겠지요. 우리는 십자가를 그 원의 그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면 지금은 너무나 많이 꾸며지고 순화되어서 마치 십자가가 참으로 아름다운 형상인 양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의미하는 바는 '고통'이자 '죽음'입니다. 먼저 이 이해를 잘 굳히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다음으로 이해해야 할 것은 '고통'입니다. 과연 고통은 무엇일까요? 고통에는 크게 3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1) 자연적인 본성 안에서 빚어지는 고통, 2) 죄의 결과물인 고통, 그리고 3) 타인을 위한 희생의 차원의 고통.

1) 예컨대 우리의 '늙고 병듦'은 자연적인 본성 안에서 비롯되는 고통입니다. '배고픔'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설물을 오래 참아서 생겨나는 것도 자연스런 고통입니다. 이런 것들은 받아 들이거나 해소하면 그만입니다. 물론 요즘에는 이런 고통, 특히 '늙어감'의 고통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해서 그 늙은 나이에도 백지장처럼 화장을 하고 붉은 립스틱을 바르며 자신을 꾸미는 이들이 있고, 좋다는 건강식이란 건강식은 다 찾아먹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쓸데없는 노력은 그만두고 늙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2) 죄의 결과물인 고통은, 우리가 만들어 낸 고통입니다. 우리는 필요 이상의 걱정이 많고 이런 걱정은 자연 스트레스를 유발 시키며 이 스트레스는 몸에 이상 작용을 낳습니다. 현대인의 질병 가운데 적지 않은 것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그저 몸을 따스히 하고 품위를 유지할 정도의 단정한 옷이면 될 것을, 무슨 메이커를 사지 못해서 안달을 하고 더 고급 스러운 것에 눈에 불을 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자신이 가진 악습을 그대로 방치하는 경우입니다. 담배나 술을 과하게 하는 분들은 그 결과물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습니다. 타인을 미워하고 또 미워하고 증오해서 생겨나는 그 결과물들도 마땅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특히 요즘 많은 분들은 타인에 대한 증오를 스스럼 없이 키워 나가면서 그 합당한 이유를 여기 저기에서 찾아냅니다. 최근 인터넷 상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대선 문제에 있어서 필요 이상으로 서로를 적대시하는 분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저런 죄의 결과물로서의 고통이 적지 않고 우리는 그것에 분명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3) 이 고통은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고통입니다. 하지만 이런 비유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 버린 쓰레기를 솔선수범해서 치우는 사람은, 그 더러운 쓰레기를 손으로 집어서 쓰레기통까지 옮겨 넣는 행위를 통해 타인의 죄의 결과물을 상쇄시키는 셈입니다. 바로 이 희생, 이 고통이야말로 진정한 '십자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이전 세대와 이후 세대의 모든 죄성, 악을 감싸안고 이 '솔선수범'을 보이셨습니다. 의인을 위해서 죽겠다는 사람은 있어도, '악인'을 위해서 죽겠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잃은 양들, 죄인들을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내어 바치셨고 그 열매를 이전 이후의 모든 세대가 함께 나누게 된 것입니다. 시간 안에 머물러 있는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시간의 '충만함'으로 세상을 바라보시는 하느님께는 예수님이 채우신 수난의 시간이야말로 모든 세대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말이 너무 장황해져서 이 정도에서 그치겠습니다. 앞서 질문하신 자매님의 경우를 살펴보면, 나의 '그릇된 의지'로 파생되지 않은 모든 고통은 그것을 기꺼운 마음으로 감싸안을 때에 그것은 훌륭한 십자가로 변모하게 됩니다. 그래서 경제력이 없는 남자와 혼인 하셨어도, 그런 삶의 조건들을 수용하고 남편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훌륭한 십자가이고, 비정상적인 애를 낳아서 그 아이를 모성을 뛰어넘는 사랑으로 길러낸다면 그 역시 훌륭한 십자가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그릇된 의지'에서 파생된 것은 죄의 결과물인 고통이고 그것은 끊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술을 지나치게 즐기는 사람이 그 다음날 아침에 구역질을 하면서 '이건 내 십자가야'라고 하는 건 '어불성설' 즉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젊었을 적 마누라를 사정없이 후려치던 남편이 늙어서 그 아내와 자녀들의 괄시를 받으면서 '이건 내 십자가야'라고 하는 것도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1)번의 고통은 그 흐름에 따라서 내가 잘 수용할 때에 십자가가 될 수 있습니다.
2)번의 고통은 나 스스로 당장 끊어야 하는 것이지 절대 십자가가 될 수 없습니다. 이 고통은 피하면 피할수록 좋습니다.
3)번의 고통은 가장 훌륭한 십자가, 우리의 '영생'을 더 찬란하게 가꿀 십자가로 우리가 이 고통에 마음을 쏟고 이 고통을 얻을 기회를 찾아서 수용할 수만 있다면 가장 훌륭한 십자가가 완성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이해를 하면서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십자가 바로 뒤에 숨어있는 '부활의 영광'입니다. 이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길은 '죽음' 뿐입니다. 우리가 일상 안에서 더욱더욱 죽어나갈 때에 우리의 부활은 더욱 더욱 가까이 다가옵니다. 우리의 죽음이 더욱 헌신적이 될 때에, 그 영광은 더욱 찬란히 빛나게 됩니다. 이제 순교의 시대는 지나가고 지금은 일상 안에서의 작은 순교의 시기가 다가왔습니다. 텔레비전에 죽고, 뉴스기사에 죽고, 육욕과 탐욕과 호기심에 조금씩 죽어나가시길 바라겠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죽을 때에 우리 안의 참된 인간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이 여정에 모두 동참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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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