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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두려워함(경외)


하느님을 두려워함(경외)

이는 성령의 은사 중 하나이지요.

공포와 혼동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공포는 미지의 것을 겁내는 마음입니다.
마치 칠흙같은 밤길을 가다가 갑자기 개 짖는 소리가 근처에서 들리는데
실체는 보이지 않아서 공포에 질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나 보았을 때에 그 소리의 출처는
작은 강아지와 같은 것이지요.
공포는 다만 우리의 마음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만들어내는 감정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공포에 차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요.
'걱정'이라고 표현되는 건 거의 이 '공포'에 속합니다.
걱정을 공포로 바꾸어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돈 걱정(공포)', '생활 걱정(공포)'
지금 먹을 밥이 있고, 나에게 일할 능력이 있음에도...
우리는 더 가지지 못해 '걱정'을 하고 결국 스스로 '공포'에 싸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즉 경외는...
미지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분의
그 사랑이 너무나도 광대하심, 너무나 크심을 앞에 두고
우리가 겪게 되는 마음입니다.

이에 대해 감히 빗댈 비유가 없습니다.
누구는 거대한 폭포의 장엄함 앞에 선 인간의 마음을 묘사하기도 하지만,
그건 자연의 경이이지 그 앞에서 그 폭포의 마음을 느낄 순 없으니까요.

굳이 비유를 찾자면 이는 마치,
나를 너무나 사랑해주신 어머니,
당신의 모든 것을 오직 나를 위한 사랑으로 희생하시는데도
나는 그 마음을 모르고 갈수록 엇나가기만 하고
온갖 도피생활과 감옥생활을 다 하는데도
끊임없이 나를 지지해주시고 옥바라지를 해 주시다가
결국 내가 중병에 걸려 앓아 누웠는데
어머니가 한 날 찾아오셔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걸
매정하게 '꺼지라'고 물리쳤다가
어느날 문득 큰 수술을 받고 낫고 오랜 기간을 회복하고
결국 집으로 돌아왔는데,
알고보니 어머니가 자신의 신장을 나에게 내어주시고
어머니는 합병증으로 앓으시다가
홀로 집에서 돌아가시어 그 시신과 일기장을 발견하는 느낌이랄까...

비유가 좀 그렇긴 한데...
바로 그 순간에 느끼는 우리의 절절한 마음이 그나마 조금은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
당신의 외아들마저 내어주어 우리의 어둠을 치유해 주려고 애쓰셨던 사랑을
우리가 그 동안 무시해 온 걸 올바르게 깨닫는다면,
우리의 삶은 바뀌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 사랑을 무시하고
심지어는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지경에 있는 것이지요.

성령을 제대로 받은 이는
하느님의 존재따위에 대한 의심에서 벗어나서
하느님의 그 마음에 다가서려고 노력하면서
그분 앞에서 제가 앞서 설명드린 마음을 겪게 된다
(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저 역시도 미흡해서요.)

결국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 우리를 압도하는 것이지요.
모르긴 해도 수많은 성인들이 '탈혼'을 체험하고 '황홀경'에 빠졌던 이유는
바로 이 경외에 사로잡힌 게 아닐까 조심히 추측을 해 봅니다.
그런 고로 지금 이 글을 적고 있는 저자도 참으로 부족한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 더욱 더 나 자신을 봉헌해서 이 경외를 제대로 갖추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도 화이팅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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