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3주 주일 복음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인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향한 그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굉장히 구체적이고 조목조목 알려준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도 가서 물어보고 싶을 지경입니다. 그는 옛 가죽부대의 마지막 인물로서 우리는 여전히 옛 포도주를, 옛 것들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옛 것의 특징은 낡아 있다는 것, 정지해 있다는 것,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딱딱 정해진 것을 좋아합니다. 뭔가 틀이 있고, 그 틀만 벗어나지 않은 채로 놀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그 내면에 숨겨진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의 것을 보장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해진 틀 안의 것을 보장된 나의 것으로 삼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것'을 챙기려 들고, 이런 우리에게 하느님은 그 틀을 더욱 더욱 좁혀 버립니다.
부자청년을 기억하시는지요? 10계명을 다 지켰지만 결국 예수님의 마지막 명에 슬퍼하며 돌아갑니다. 반면 예수님은 자유로운 영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한 일이라고는 그때 그때에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일을 실천하신 것 뿐입니다. 이 예수님의 자유는 '나의 것'을 가진 자들에게는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아, 이 미묘한 차이를 어떻게 하면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울타리 안의 양들을 상상해 봅시다. 밖으로 둘러쳐진 울타리가 있고, 그 밖에는 늑대들과 독풀들 및 여러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양들은 외견상으로는 다들 똑같은 양들이지만, 어느 양들은 울타리 밖을 체험하고 싶어하고, 어떤 양들은 울타리 한 가운데에 있는 목자에게 집중해 있습니다. 목자는 울타리 밖의 위험을 잘 알아서 양들에게 나가지 말라고 사랑으로 주의를 주지만, 호기심에 가득 차서 마음이 밖을 향해 있는 양들은 곧잘 뛰어나가기 일쑤입니다. 그럴 때마다 목자는 당신 스스로 울타리 밖을 나가 늑대의 위협을 무릎쓰고 그 나간 양을 되찾아 돌아옵니다. 반면 목자의 뜻에 힘을 쏟는 양들은 이미 울타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오직 목자가 바라는 것을 이루려 하고, 목자의 시선에 눈을 맞추며, 목자가 잃은 양들을 찾아 사라져 있는 동안에도 울타리 안에서 목자의 명을 꿋꿋이 지키며 목자를 기다립니다. 이들은 심지어 목자가 같이 양을 찾으러 나서자고 할 때에 아무런 두려움 없이 울타리 밖을 나갈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그만큼 목자를 믿기 때문입니다.
말이 장황해 질수록 이해가 더 부족해질까 걱정스럽습니다.
2줄 요약
1) 요한, 옛 것의 대표주자. 할 일을 정해줌.
2) 예수, 새 것의 대표주자. 성령을 주고 우리 스스로 '사랑'할 완전한 자유를 선사함.
그래서 요한은 오시는 분의 신발끈을 풀 자격도 없다고 표현합니다.
제 아무리 율법의 조목조목을 일일이 다 지키는 것보다는
위험을 무릎쓰고 사랑을 하는 것이 더 위대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대빵입니다.
요한은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위대했지만,
하늘나라에 있는 그 누구도 요한보다는 낫다는 말의 뜻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