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루카 5,39)
좋고 나쁨의 분별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요? 꽃을 보면서 누군가는 모양새가 좋다고 할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향이 별로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꽃의 좋고 나쁨은 그 꽃 본연의 존재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판단기준에 달린 것입니다.
포도주의 좋고 나쁨은 무엇으로 분별할까요? 맛과 향과 색이 있을 것입니다. 헌데 그 역시 주관적입니다. 누군가는 떫은 맛을 즐기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는 단 맛을 즐기는 사람이 있을테니까요. 무언가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기준이 필요한 셈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의 방식과 가르침을 ‘새로운 포도주’에 비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포도주는 새로운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시지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은 분명 새로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여전히 옛 것을 즐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것은 무엇이고, 옛 것은 무엇일까요?
옛 것은 이미 이스라엘에 만연해 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율법이지요.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 이를 불경히 여기는 것입니다. 사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움직임입니다. 주일미사에 나오는 이는 경건하고 나오지 않는 이는 불경건한 이가 됩니다. 그래서 그런 이들은 주일 미사에 빠지면 반드시 성사를 보지요. 반면 내면으로 돈 욕심에 가득 차 있다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도둑질을 한 일이 없으면 그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옛 것은 새로운 지금의 시대에도 여전히 만연해 있는 성향입니다.
새로운 것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찾아다니고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99마리의 안전한 양보다 길 잃은 양을 찾아 다녔지요.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에게서 부담을 느꼈고 그분의 가르침을 좀처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이 옛 부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에 새로운 가르침이 들어가면 찢어질 것이 분명했지요. 그들은 그저 편안하고 안락한 신앙생활을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떠할까요? 적지 않은 이들은 신앙은 신앙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실제 삶을 사는 것과 신앙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지요. 그들은 신앙이 신앙의 고리타분한 자리, 즉 교리, 성사, 전례에 머물러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구체적인 삶을 침범하지 않기를 은근히 바라지요.
하지만 이를 어쩐답니까? 예수님은 가만히 앉아 계시는 분이 아니시니 말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쌍날칼과도 같아서 사람의 속에 파고들어 숨은 생각을 밝힐 것입니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1코린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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