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1코린 15,44)
바오로 사도는 물질적인 몸과 영적인 몸을 구분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물질적인 몸이 죽고 나면 영적인 몸이 살아난다고 가르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1코린 15,44)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지닌 몸은 바로 물질적인 몸입니다. 이 몸은 물질계에 종속된 몸입니다. 일정한 공간 안에 머무르는 몸이지요. 그래서 그 한계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습니다. 즉 어디를 가고 싶어도 반드시 물질적인 수단을 통해서 갈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훗날 우리가 영적인 몸을 입으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물들과 소통하게 됩니다. 우리는 공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인 방에 문을 통과하지 않고도 들어오신 것처럼 우리는 현상계의 법칙들을 초월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연구된 바가 없습니다. 사실 과학은 이를 밝혀내지 못합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물질계의 법칙을 관측하고 그것을 공식화 하는 것인데 영적인 세계는 물질과 상관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그것을 알 도리가 없는 셈이지요. 다만 우리는 믿음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부활한 모습을 관찰한 사도들과 다른 성인들의 증언으로 짐작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지금 지니고 있는 몸을 잘 보살펴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책임있게 우리의 몸을 다스리기를 바라시지요. 하지만 지금의 물질적인 몸에 종속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영혼이 몸을 다스리도록 해야 합니다. 몸을 올바로 잘 보전하는 것과 몸에 집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방향입니다. 예컨대 옷을 단정하게 입는 것, 터진 곳을 꿰메 입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이미 옷이 충분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색깔에 집착해서 혹은 디자인에 집착해서 옷을 마구 사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몸을 건강하게 잘 보살펴야 하지만 건강에 집착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인간의 몸은 자연스러운 노화의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고 인간은 그런 과정 속에서 내면의 지혜를 키울 수 있는 법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쾌락을 즐기는 것을 기피하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이 쾌락에 집착하는 것은 당신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즉, 우리가 올바른 절제 하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육체적 기쁨을 누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우리는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원하는 육체적 활동을(성행위를 포함해서) 허락된 범위 안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러한 것들에 집착해서 이미 넘쳐 흐르는 음식을 두고도 다른 맛깔스런 음식을 찾아 돌아다니거나 하느님께서 허락한 관계를 넘어선 다른 성관계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결국 그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해악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영혼이 육신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육신이 영혼에 복종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영혼이 육신을 따르기 시작하는 날, 그의 영혼은 무디어지고 죄악에 잠겨들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면 훗날 우리에게 주어질 영의 몸도 엉망이 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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